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혁 Feb 05. 2020

[주짓수 에세이] 즐거움의 뒷면

즐거움과 고통은 어울릴 수 있는 사이일까?

손가락 부상. 주짓수를 하는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부상이다. 운이 좋게도 나는 5년 넘게 주짓수를 해왔지만 손가락에 문제가 생겼던 적이 없었다. 테이핑 한 번 해본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한데 결국 나에게도 손가락 부상이 찾아왔다. “나는 괜찮겠지?”라는 생각이 “이래서 테이핑을 해야 되는 거구나.”로 바뀌게 되는 순간이었다. 부상을 입는 순간에는 몰랐지만 다음날 손가락에 느껴지는 통증으로 인해 골절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골절된 손가락은 마디가 두꺼워졌고 형태도 바뀌었다. 울퉁불퉁 못나졌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싶었지만 한참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형태도 강도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모든 부상이 그렇듯 완치는 어려울 것 같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한 번 접질린 발목은 쉽게 다시 접질리게 되는 것처럼 손가락도 마찬가지다. 주짓수를 할 때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다친 손가락을 다시 다치게 되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약해진 손가락은 페트병 뚜껑을 여는 일과 같이 평상시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행동에도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다시 다치지 않으려면 재활치료에 신경 써야 하지만 손가락은 재활이 어려운 것 같다. 손가락 마디의 근육을 강화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다친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손가락 부상은 참으로 귀찮은 존재다. 큰 고통은 아니지만 수시로 나를 찾아와 괴롭히는 모기와도 같다.


재밌는 점은 주짓수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 부상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 손가락에 칭칭 테이핑을 하고선 주짓수를 한다. 나 또한 최근 검지 첫 번째 마디가 뒤틀리는 부상을 입었다. 눈으로만 봐도 손가락이 휘었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의 부상이다. 하지만 병원에 가볼 생각도 없이 아랑곳하지 않고 주짓수를 한다. 그것도 다치기 전과 똑같이. 테이핑을 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기기는 했다. 다친 검지와 멀쩡한 중지를 싸잡아 테이핑을 하게 되었다. 나름 중지가 검지의 깁스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손가락에 테이핑을 꼼꼼하게 하더라도 통증은 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주짓수를 하기 위해서는 통증을 끌어안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으니까. 이제는 언제 봐도 어제 본 것 같은 친한 친구처럼 손가락의 통증과 익숙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울퉁불퉁해진 손가락을 볼 때면 “즐거움과 고통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주짓수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많은 부분에서 그렇다.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사랑인 것 같다. 사랑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지만 그 뒷면을 들추어보면 고통이 있으니깐.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과 사랑이 떠난 후에 찾아오는 이별은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에겐 피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주짓수를 하는 사람이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손가락의 통증처럼 말이다. 문제는 끌어안아야 하는 고통을 없애야 하는 고통으로 착각할 때 발생하는 것 같다. 없앨 수 없는 고통을 없애려 할 때 고통은 더 큰 고통이 되어 돌아오곤 한다.


사랑을 하는 데에 있어 고통을 없애려는 행동, 그중 하나가 바로 집착이다. 내가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범위, 그 안으로 상대를 밀어 넣으려는 행위가 집착이니 말이다. 상대가 그 범위를 벗어난 상황만큼이나 집착하는 사람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일도 없다. 그런 예측 불가능한 상황은 “혹시 ~일이 발생하진 않을까?”라는 불안감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집착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불안하게 했다는 이유로 상대를 나무라곤 한다. 하지만 없앨 수 없는 고통을 없애려 한다면 고통은 더 큰 고통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구속에 지친 상대가 내 곁을 떠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사랑에 있어서 즐거움과 고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오히려 고통이 있기에 즐거움이 더 빛이 날 수도 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내 곁에 있어줄 때 소중한 감정은 더 커질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살다 보면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게 될 때가 있다. 행복에 관해서는 특히나 더 그렇다. 삶에서 행복만큼이나 이분법적 사고에 빠지기 쉬운 경우도 없는 것 같다. "현재 당신은 행복합니까?, 아니면 불행합니까?" 행복과 불행은 마치 1과 0처럼 선명하게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관해 스스로 답하기 전에 주위를 둘러보곤 한다. 자신의 행복을 주변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 판단하는 것이 익숙해져 버린 탓이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뿐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기억을 상기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를 타인에게 꺼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SNS는 이분법적 사고를 선동하는 힘을 갖게 된다. 알다시피 SNS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명하기만 하니 말이다. 0이 아닌 1. 불행이 아닌 행복. 그런 사람들을 볼수록 나 자신은 초라해질 뿐이다. 1이 아닌 0. 행복이 아닌 불행.


누구나 1이 되기 위해, 행복해지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그 방식이 꼬여있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시나 이분법적 사고에 사로잡혀 고통을 완전히 없애야만 하는 것으로 여길 때다. 사랑을 하면서 느껴지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 상대를 구속하는 것처럼 삶에서도 고통을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된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겐 무엇보다 0을 없애는 것이 최우선이다. 행복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분법적 사고 안에서는 0이 없어야만 행복한 거니깐. 하지만 그러한 방식으로는 사랑에 균열이 생기듯 결국 삶에도 균열이 생길 뿐이다. 집착에 지친 상대가 나에게서 멀어지듯 행복 또한 멀어져만 갈 뿐이다.


내 삶이 그러했다. 고통 없애기에 혈안이 된 상태. 고통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나를 찾아왔다. 한데 나보다 앞선 사람은 세상 어딜 가나 존재했다. 그랬기에 늘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따라 하는 것뿐이었다. 외모를 가꿔야 했고, 부지런해져야 했고, 영어 공부를 해야 했고, 독서를 해야 했다. 흔히 이야기하는 자기계발에 몰두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즐거움을 가져다주던 주짓수와도 멀어지게 되었다. “운동선수할 것도 아닌데 뭘...”이라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남는 시간은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흉내 내는 데 사용했다. 삶을 주짓수로 비유하자면 나는 즐거움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손가락 통증에만 매달린 꼴이었다. 미련하게도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현재의 즐거움, 그 뒷면에는 반드시 고통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이러고 있어도 되나?”, “이러다 다른 사람들보다 뒤처지는 건 아닌가?” 하지만 하나의 고통을 없애면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으로 가는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문뜩 정신을 차려보면 즐거움과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앞으로 올라가야 할 계단이 아닌 여태껏 올라온 계단을 바라보며 의구심에 사로잡히곤 했다. "어쩌면 행복은 고통을 없애려는 노력보다는 현재의 즐거움을 끈덕지게 붙잡아보려는 노력에 달려 있지는 않을까?"


삶에는 1과 같은 행복도 0과 같은 불행도 없었다. 1과 0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했다. 삶은 그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유동적인 것이었다. 주짓수를 하며 손가락의 통증을 끌어안게 된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통증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짓수를 즐기게 된 것처럼 삶에서도 이분법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때 내 곁을 떠났던 즐거움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0에 집착할수록, 마찬가지로 1에 집착할수록 삶에서 즐거움은 멀어져만 갔다. 잊지 말아야 할 건 즐거움과 고통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다는 점이다. 하지만 서로를 분리할 수는 없더라도 한쪽 면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 생각한다.  

이전 15화 [주짓수 에세이] 고통보다 소중한 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