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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혁 Feb 05. 2020

[주짓수 에세이] 가르침과 사랑

호신과 주짓수만큼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할 가르침과 사랑

호신과 주짓수는 가까운 사이다. 그 어떤 스포츠보다 더. 미국 FBI에서 인증을 하면서 주짓수에는 여성이 남성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무술이라는 칭호까지 붙게 되었다. 그래선지 주짓수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종종 호신의 필요성을 강조하곤 한다. 우리는 언제 위험상황이 닥쳐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사회를 살고 있으니 호신술을, 즉 주짓수를 배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실제로 성별을 불문하고 주짓수를 배운 사람이 괴한으로부터 벗어나는 영상, 심지어 괴한을 제압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까지 인터넷에선 쉽게 찾아볼 수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석연치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 일까?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건 특별한 일이다. 그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염원하는 일이기에. 그렇게 되기 위해선 가르침과 사랑이 주짓수와 호신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사랑이 빠진 가르침은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다른 일처럼 의무로 추락해버리기 쉽기 때문에. 우린 뼈저리게 겪고 자라지 않았는가. 그러지 않은 가르침을. 가르침을 받는 학생의 신분에서는 잘 몰랐지만 부모가 될 수 있는 나이가 되어보니 그동안 내가 받아온 가르침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었다. 돌이켜보아도 나의 삶에선 선생님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단 한 명도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할수록 화만 치솟을 뿐이었다.


사랑이 빠진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같은 소리를 했다. "좋은 대학 가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니? 선생님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라." 그들은 입시라는 틀에 박힌 가르침을 강조했고, 그러기 위해 폭력까지 일삼았다. 자신이 지닌 권위에 찌들 대로 찌들었는지 학생에게 행하는 어떠한 폭력적인 행동도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는 듯 보였다. 물론 그러한 행동을 이제 와서 완전히 틀렸다 단정 짓긴 어려울 것이다. 나라가 그랬기에, 교육제도가 그랬기에 그들도 그랬을 테니까. 하지만 나를 가르친 어떤 선생도 비윤리적인 교육제도에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비윤리적인 교육제도를 바꿔보려는 제스처는커녕 비윤리적인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려 하지도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선 대학 합격률이 선생들의 실적과 연결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그들은 높은 실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분 나쁜 과거의 경험이 험악한 사회를 강조해 주짓수를 배워야 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오버랩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기분이 찜찜했던 것이다.


가르침과 사랑이 함께하는 경우는 어떨까? 특별한 사람을 찾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의 누이만 보더라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 누이로부터 카톡이 온다. 확인해보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주소가 덩그러니 와있다. 청원에 동의하라는 암묵적인 강요다. 내용을 보면 전부 아이들과 관련되어 있다. 미세먼지에 관한 학교 대책이라던가, 학교 주변 공장지대의 문제성에 관한 내용이던가, 교육제도 개편에 관한 내용 등이다. 과거 나의 누이는 청원이나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다. 환경을 바꿔보려 하기보단 환경에 자신을 맞춰 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출산을 하고 나서는 달라졌다. 아이가 살아갈 지역의 환경, 받게 될 교육제도에 대해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이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은지 평생 안 하던 공부까지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할수록 더 좋은 걸 주고 싶고, 보여주고 싶기에.



“호신을 가르치는 일에 사랑이 함께한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진심으로 그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염원한다면 단순히 호신을 가르치는 일에서만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험악한 사회이기에 호신이 중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호신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호신을 가르치는 사람이 호신이 필요 없는 세상을 꿈꿔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무도인’이라면 그에 걸맞은 사상은 필수 불가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무도인(武道人)의 도(道)는 길을 뜻한다. 그 길은 다름 아닌 삶의 길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길 말이다. 그 길엔 결코 사랑이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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