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종혁 Feb 05. 2020

[주짓수 에세이] 작은 것들을 위한 감각

죽었던 감각이 다시 살아날 때

꽤나 오랜 기간 주짓수를 하다 보니 배웠던 기술을 다시 배우게 되는 날이 잦아졌다. 클래스에 초보자가 경력자보다 많은 날엔 기술 수준이 초보자에게 맞춰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경력자가 초보자에게 눈높이를 맞출 수는 있어도 초보자가 경력자에게 눈높이를 맞출 수는 없다. 이 말이 경력자들이 손해를 본다는 걸 뜻하는 건 아니다. 모든 분야에서 그렇겠지만 주짓수에서도 기본기는 경력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중요하다. 그렇기에 중요한 기본기들은 수차례 다시 배우게 되어도 무방하다. 수차례 다시 배워도 부족한 것이 기본기고, 알아도 통하는 게 기본기다.


같은 기술을 수차례 다시 배우게 되면서 깨닫게 된 점이 있다. 다시 배울 때마다 미세한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시선의 차이다. 다시 배울수록 시선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이동했다. 초보자일 땐 동작을 따라 하는 것에 급급해 큼지막한 움직임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배울 땐 달랐다. 배웠던 기술을 스파링에서 써먹다 보니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 알게 되었고, 그 기술을 다시 배우게 될 땐 문제가 있던 부분에 시선이 먼저 갔다. 어떤 식으로 움켜잡아야 하는지, 어느 부분에 체중을 실어야 하는지 등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작은 부분이었다.



언젠가 월드 클래스 선수의 세미나에 다녀온 관장님께서 말씀을 꺼낸 적이 있다. 그 선수의 영상을 수십 번 이상 보았기에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기술이었지만 직접 보니 또 다른 시선의 차이가 발생했다고 하셨다. 주변 사람들이 손의 위치에, 발의 위치에 주목하고 있을 때 관장님의 눈은 보다 작은 곳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살짝 세운 발뒤꿈치, 미세하게 틀어져 있는 머리의 각도 등 웬만한 사람은 인식하기 어려운 아주 작은 부분이었다. 무언가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그에 관한 레이더는 더 섬세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실력자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작은 차이가 결국 기술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게 된다. 그렇기에 세계 정상권 선수들의 연습량을 따져보면 각자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일 것이다. 연습량이 많다는 말은 같은 기술을 수도 없이 반복하게 된다는 말과 같으며, 이는 곧 아주 작은 부분까지 신경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 궁금한 점이 있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도 결국 승패가 갈리게 된다는 점이다. 대체 어떤 선수가 승리를 거머쥐게 되는 것일까? 아마 더 미세한 부분까지 인식하고 주의를 기울인 선수일 것이다. 그렇다면 연습량을 한계까지 밀어붙인 그들 사이에서도 차이를 발생시키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더 작은 것을 인식 가능케 하는 무언가가.


나는 그 차이를 사랑의 차이라 이야기하고 싶다. 사랑에 빠지면 빠질수록 보다 작은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이 살아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사랑은 능동적이라는 말보단 수동적이라는 말과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하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어쩔 수없이 그렇게 되는 거니까. 사랑에 빠졌을 때가 기억이 난다. 시들었던 감각이 다시 살아나 한 대상을 향했던 기억이. 그땐 그 사람에게 일어나는 작은 변화에 무척이나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메시지, 말투, 목소리, 표정 등에서 미세한 차이가 느껴질 때면 한없이 기뻐하기도, 안절부절못하기도 했다.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신경 쓰지 않아 보려 했지만 의지로 어떻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작은 차이, 그 작은 진동이 울리는 날은 나의 하루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날이기도 했다.


사랑이 끝났을 때 또한 기억이 난다. 이별 후 어떤 하루는 슬픔에 사로잡혔고, 다른 어떤 하루는 슬픔을 잊기 위해 다른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마음이 잠잠해졌을 때쯤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작은 것들을 위해 살아났던 감각이 서서히 죽어갔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러한 나의 변화를 나보다 그 사람이 먼저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그렇게 그 사람에게 무관심했던 기억, 상처 줬던 기억이 떠올라 후회스럽기도 했지만 당시의 나는 내게 찾아온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과정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게 찾아왔던 사랑은 매번 비슷한 방식으로 끝이 났다.


작은 것들을 위한 감각과 사랑은 꽃과 물 같은 사이인 것 같다. 함께 짝을 이루어 활짝 피기도 하지만, 그중 하나만 빠져도 시들게 되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까지 주짓수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작은 것들을 위한 감각이 살아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 꽃이 언제 질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느낀 사랑이란 그런 거니깐. 하지만 그 끝을 지금 생각하고 싶지 않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저 어제처럼 오늘도 주짓수가 하고 싶기에 미루지 않고 해야겠다는 마음뿐이다.

이전 11화 [주짓수 에세이] 해진 도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