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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혁 Feb 05. 2020

[주짓수 에세이] 해진 도복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물건

도복은 두껍고, 거칠고, 무겁다. 한데 그렇게 튼튼해 보였던 도복조차 세월의 힘을 견뎌낼 수는 없나 보다. 2년 정도만 꾸준히 입어도 색이 다 빠져버리고 목, 무릎 등 이곳저곳에서 흠집이 발견된다. 흠집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와도 같다. 그 흠집을 시작으로 도복은 쭉쭉 쉽게 찢어져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도복에서 흠집이 발견되면 곧장 세탁소에 맡긴다. 조금이나마 더 입고 싶은 마음에 세탁소 사장님에게 천을 덧대서 흠집을 메워 달라 부탁한다. 새 도복이 있지만 헌 도복에 자꾸만 손이 간다. 옷장 한 구석엔 수선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해져버린 도복도 있다. 이상하게도 쉽사리 버려지지가 않는다.


계절이 변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옷장을 뒤지게 된다. 계절에 맞는 옷은 꺼내고, 입던 옷은 다시 넣어 두기 위함이다. 그러다 보면 입지 못할 것 같은 옷이 발견되곤 한다. 새것에 가까운 옷도 있지만 입지 않아 짐만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옷들이 발견될 때면 따로 모아 두었다가 집 근처 헌 옷 수거함에 넣는다. 옷을 한 보따리 들고 헌 옷 수거함으로 걸어가다 보면 가끔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이렇게 멀쩡한 옷들도 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왜 도복은 그리도 오래 입으려 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둘 다 입는 목적은 비슷했다. 신체를 보호하고, 체온을 유지하고,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옷은 버릴 수 있었지만 도복은 그러지 못했다. 유행의 문제도, 가격의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끝끝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또다시 계절이 바뀌어 옷장을 열게 되었다. 역시나 몇 가지 옷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 입었는지 목이 다 늘어나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따로 모아두었다가 집 근처 헌 옷 수거함에 넣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옷을 붙들고 한 참을 고민하다가 다시 옷장 안에 넣어 두게 되었다. 순간 풀리지 않았던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의문은 풀리게 되었다. 그 옷들은 내가 행복했던 순간, 그 순간들을 함께 했던 것들이었다. 사랑에 빠졌을 때 입었던 옷, 사랑했던 사람에게 선물 받았던 옷,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갔을 대 입었던 옷. 옷뿐만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 방 곳곳엔 행복의 순간을 함께 했던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헌 도복에 손이 가는 이유를 알겠다. 헌 도복을 버릴 수 없는 이유를 알겠다. 그 도복들은 내가 행복했던 순간을 함께했던 것들이었다. 그 도복을 입고 주짓수를 하던 나는 행복했었던 것이다. 헌 도복을 계기로 피어난 의문은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는 물건들로 이어졌다. 알게 된 사실은 그 물건들은 가끔씩 나의 시간을 과거의 한 순간으로 되돌리곤 했다는 것이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을 함께 했던 음악이 귓가에 들려오면 시간이 그때로 돌아가는 것처럼.


어쩌면 나는 그런 물건들은 버리지 못하는 만큼 과거의 나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물건들을 억지로 버려봐야 별다른 소용이 없을 거란 생각도 든다. 억지로 버리려 한다는 사실 자체가 여전히 내가 그 물건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그래 온 것처럼 그냥 놔둬 볼 생각이다. 버리려 해도 버려지지 않던 물건이 자연스레 버려지게 되는 날이 올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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