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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혁 Feb 05. 2020

[주짓수 에세이] 그리움

'좋아함'을 알려주는 분명한 척도.

딱 한 녀석이 있다. 친구들 중에 나처럼 주짓수를 하는 녀석이. 친구는 나로 인해 주짓수를 접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집 근처에 있는 체육관을 다니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무얼 하든 금방 싫증을 내던 친구인데 주짓수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1년 가까이 꾸준하게 하고 있는 걸 보면. 그 친구는 나를 소개할 때 불알친구라는 말을 쓴다. 어릴 때부터 허물없이 지냈던 터라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이기에 그런 것 같다. 그런 친구와 술을 마시다 보면 이야기가 길어져 막차를 놓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럴 때면 친구는 어김없이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집에만 가면 친구는 날 부추기기 시작했다. 주짓수 기술을 알려달라고. 문제는 서로가 한 번 엉겨 붙으면 기술 연습만으로는 끝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엉김은 매 번 스파링까지 이어졌다. 스파링을 하다 보면 온 몸이 땀에 젖는 건 당연했고, 방바닥에 살이 쓸리거나 벽에 몸을 부딪쳐 멍이 드는 경우도 허다했다. 옷이 젖고 몸에 상처가 생기는 건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서로는 주짓떼로답게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랬기에 스파링은 늘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끝이 날 수 있었다.


친구는 한창 주짓수에 재미가 붙을 때쯤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것도 제주도 서귀포로. 서귀포에서 스쿠버다이빙 관련 사업을 하기 위함이었다. 친구는 아쉬워했다. 서귀포에도 주짓수 체육관이 있었지만 그동안 같이 땀을 흘리며 친해진 지인들과 멀어진다는 게 슬펐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친구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 날 꼬드기곤 했다. 제주도에서 몇 달 살아볼 생각 없냐고. 같이 스쿠버 다이빙으로 돈도 벌고 주짓수도 하자고. 몸만 오면 된다고. 때마침 나는 백수였기에 언제든 제주도에 내려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나는 스쿠버다이빙 기본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가 나로 인해 주짓수를 접하게 된 것처럼 과거의 나 또한 그 친구로 인해 스쿠버다이빙을 접하게 되어 자격증을 딴 적이 있었다.



결국 서귀포에 내려가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결심하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제주도의 삶이 낭만 있을 것 같았고, 퇴직금도 다 떨어져 갔고, 오랜만에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상상할 수 있게 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서귀포에도 주짓수 체육관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짐을 쌀 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물건을 포기해야만 했다. 주짓수 도복 세 벌이 캐리어의 절반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런 캐리어를 끌고 서귀포에 내려가 다음날부터 일을 시작했다. 사실 일이라 해봤자 가이드 역할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이 스쿠버다이빙을 안전하게 할 수 있게끔 옆에서 돕고, 바닷속 길을 안내하는 것이다. 시간이 남을 때면 손님들이 묵는 숙소를 청소했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끝마친 후에야 서귀포 번화가에 있는 체육관에 가볼 수 있었다.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서귀포 체육관에서 친구와 함께 주짓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에게 문제가 될 만한 건 하나뿐이었다. 체육관에 나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체육관에 나가려면 일을 끝마쳐야만 했는데 그 끝마침의 시간은 그날 오는 손님의 숫자에 따라 달라지곤 했다. 그러다 본격적인 성수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손님의 수가 급격하게 늘기 시작하면서 일을 마치는 시간은 뒤로 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체육관에 못 나가는 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을 마치는 시간도 문제였지만 잠수로 인한 피로 누적과 교통수단 또한 문제였다. 일을 마치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눈꺼풀 탓에 쪽잠이라도 청해야만 했고, 친구의 집이 버스가 잘 다니지 않는 동네였기에 버스의 배차 간격이 너무나도 길었다. 결국 친구와 나는 의논 끝에 다음 달은 쉬자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체육관을 한 달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상태였기에 안타까움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매일같이 주짓수를 하던 나는 주짓수 중독에 가까웠다. 어떤 운동에 중독되면 운동의 힘듦보다 운동을 하지 못함의 힘듦이 더 큰 법이다. 이 말은 운동을 못 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운동에 대한 생각은 커질 수밖에 없는 말과도 같다. 굶주릴 때 먹을 것에 관한 생각만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굶주림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굶주림은 특정 음식이 아닌 다른 여러 음식으로도 해결할 수 있지만 주짓수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나는 이 사실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과거 주짓수를 할 수 없던 때 복싱을 해보기도, 요가를 해보기도, 클라이밍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 어떤 운동으로도 주짓수를 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귀포에서 나는 주짓수를 그리워했다. 그 마음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그리움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사람을 마주하면 시선이 목덜미로 향하기 시작했다. 목덜미에서 멈춘 시선은 곧 팔목으로 이동했다. 평소였다면 나의 시선은 얼굴을 먼저 향했을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이 매혹적인 이성이었다면 시선은 얼굴을 거쳐 몸을 지나 발끝으로 이동했을 테지만 말이다. 이유는 분명했다. 주짓수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나를 상상의 세계로 내몰았다. 그곳에선 자유롭게 사람의 옷을 부여잡아 초크를 걸 수 있었고, 팔목을 부여잡아 스파이더 가드를 걸 수 있었다. 그래선지 그쪽 세계에서는 티셔츠보다는 카라티를, 카라티보다는 남방을 입은 사람일수록 호감도가 높았다. 도복과 유사한 옷일수록 부여잡기가 편했기 때문이다.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주짓수가 그리웠던 나는 이러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흐뭇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리움이 확실한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을 때 상상 속에서라도 그 사람과 함께하려는 것이 그리움이니깐. 그 사람과 함께 들었던 음악을 들을 때, 함께 걸었던 길을 걸을 때, 함께 먹었던 음식을 먹을 때 그 사람을 떠올리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그리움이니깐. 하지만 그 흐뭇함은 잠시일 뿐이었다. 짧은 흐뭇함, 그 끝에 나를 찾아오는 건 결국 괴로움이었다. 그리움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리움은 흡연과 같아 보이기도 한다. 짧은 즐거움 뒤에는 다시금 괴로움이 찾아오니깐. 하지만 백해무익이라 일컬어지는 담배와는 다르게 그리움에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좋아하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한 대상을 얼마만큼 좋아하는지는 그 대상과 떨어져 있을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분명할 수 있는 이유는 대상의 부재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만큼 그리움 또한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커질 대로 커진 그리움은 일상을 지배해 다른 어떤 것에도 집중을 할 수 없게끔 만든다. 손 쓸 겨를도 없이 상상의 세계로 내몰리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를 때 그리움만큼이나 분명한 척도가 될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주짓수가 그리움의 대상인가 보다. 근데 그 대상이 여자였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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