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광고 업계의 유명한 마스터를 초대해 강연회를 연 적이 있다. 그분은 40대 중후반쯤 보이는 외모였는데, 쉽게 입기 힘든 흰색 상하의 세트를 입고 나타났다.
강연회를 마치고 함께 커피 마시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의 손에는 10년은 거뜬히 들었을 법한 때가 타고 지저분한 흰색 가방이 들려 있었다. 화이트 쓰리 콤보다.
그냥 봐도 제법 무거워 보였는데, 처음에는 왜 저런 쓰레기 같은 가방을 들고 왔나 사뭇 궁금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며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헤어지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가방의 정체가 떠올랐다. 지금은 너무도 많이 알려진 '프라이탁'이었는데, 관련 글과 사진을 본 적은 있었지만 실물을 영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흰색 상의와 하의, 그리고 흰색 가방. 그 이상한 조합이 머릿속에 깊게 박혀버렸다. 모르면 이상한 패션이겠지만, 그런데도 그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날 이후 가까운 이가 프라이탁을 좋아해 자주 이야기를 나눴는데, 볼수록 멋진 브랜드지만 과연 나에게도 잘 어울릴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은 여러 개의 프라이탁이 얼떨결에 생겼고, 계속 사용하다 보니 트럭 방수포가 제법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된 것도 같지만, 일정부분 어색함은 아직도 남아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의 가방이 프라이탁이어서 멋있어 보였을까? 나는 브랜드명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그의 손에 들려진 꼬질꼬질한 흰색 방수포 가방이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프라이탁이라는 이름 값 때문이 아니라 그의 특이한 외모와 자신 있는 말투, 이야기를 나누며 느껴지는 가치관 등이 브랜드와 어울리는 하모니를 만들어낸 게 아닐까.
그 뒤로도 프라이탁을 든 사람은 많이 봤지만, 그분 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너나 할 것 없이 유명한 브랜드, 명품을 사랑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값비싼 제품을 걸치고도 빛이 나지 않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물건이 가진 아우라는 상당히 묘하다. 마치 연주자가 연주를 하는 것처럼 같은 곡을 연주해도 다가오는 파장이 저마다 다른 것과 유사하다.
브랜드 가치는 만든 이의 톤과 사용하는 사람의 무드가 잘 맞을 때 더욱 아름다운 빛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고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이것 저것 다 따지며 사야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멋진 브랜드를 가졌어도 자신만의 감각으로 표현해 내지 못한다면 브랜드의 아우라에 가려져 존재감 없는 사람으로 살게 된다는 뜻이다.
나는 그런 부류가 되지 않게, 그저 가져다 쓰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게 대단하지 않은 나름의 기준이 세워보았다.
바로, 뜨거움과 차가움이다. 뜨겁다는 것은 매력적인 것을 말하고, 차갑다는 것은 적당함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는 것처럼 물건도 그런 경험을 주곤 한다.
가히 운명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하나의 물건이 매개체가 되어 직업을 바꾸거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알 수 없는 미래로 달려 나가는 일은 허다하게 생겨나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를 만나기 위에 해외에 있는 본사로 날아간 나의 오래된 친구처럼 말이다.
물건을 보는 첫 번째 기준인 '매력'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끄는 힘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졌다. 얼마나 강렬하면 마음을 사로잡아 끄는 것일까. 매력적이라는 것은 아마도 '아름답다'의 최상위 단어가 아닐까 싶다.
첫눈에 반하는 것을 넘어 오래 봐도 싫증 나지 않고, 볼수록 더욱 아름다워지는 물건이 있다. 이런 지속성은 너무나 멋있다. 사람의 경우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아하게 되고, 시선이 머물게 만드는 이가 있듯이 말이다.
이와 반대로 '적당함’은 마치 뜨거워진 심장에 찬물을 확 끼얹은 역할을 한다. 너무 과열되지 않도록 차갑게 밸런스를 맞추는 것이다. 물론 경제적으로 넉넉할 때만 무언가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형편에 맞지 않는 구매를 할 수도 있고, 하필이면 지름신이 내려와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살 수도 있다. 마치 영혼라도 연결 된 듯 꼭 사야만 하는 제품이 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가야만하고, 꼭 만나야 되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나에게 적당함은 '나 스스로를 설득 가능한가'를 말한다. 얼마 전 BTS RM이 비즈빔을 중고나라에서 구입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부족한 게 없을 법한 그가 비즈빔이 너무 고가의 제품이라 중고까지 뒤졌을 리가 만무하다.
옷 한 벌을 만들더라도 굳이 어려운 수작업 공정을 선택하고, 오래 입는 옷을 만드는 비즈빔의 진정성을 알고 있기에 꼭 새 옷 이어야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게 아닐까.
오래가는 상품을 판매하는 디앤디파트먼트의 비젼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자고 나면 유행이 바뀌어있는 시대라 유행에 민감하지 않는 편이 어떤 면에서는 유리할지도 모르겠다.
반짝하고 나타나는 물건들은 대부분 빠른 속도로 지루해진다. 중고 물품을 파는 곳에는 유명한 명품들이 수두룩하게 거래를 기다리고 있는데, 대다수가 '내가 많이 아끼던 아이'이라고 소개한다.
똑같은 제품을 선물받거나, 사이즈가 안 맞거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떤 이유든지 빛을 내는 물건은 절대로 팔지 않는다. 중고 시장에 나온다는 말은 대부분 그토록 뜨겁던 심장이 식었거나, 반짝이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요즘은 무명의 디자이너의 가치를 일찍이 알아보고 투자와 후원의 개념으로 제품을 구매하는 이도 많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스토리가 있는 제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클래식한 취향의 수집가나, 값비싼 보석 같은 게 아닐지라도 접시나 찻 잔 같은 생활용품 수집가도 많아졌다.
그들의 시선은 상당히 수준이 높아서 일반인이 미처 보지 못하는, 또는 보고도 알지 못하는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는 남다른 감각을 지닌 것 같다.
나는 신제품 보다는 골동품을 향해 달려가는 연식이 제법 있는 나이지만 나름의 다양한 시도들을 해본다.
이름 없는 것과 알려진 제품을 함께 믹스 매치해서 입기도 하지만, 20대가 즐겨 입는 옷도 걸쳐보고, 60대가 입을 법한 것도 살짝 얹어본다. 시대의 뒤섞임이 이상하게 재미있다.
상의는 요즘들어 힙한 광택 탑 패딩을 입고, 하의는 남대문에서 산 엄마표 갈색 고무 바지를 입는다. 나이가 더 들더라도 누군가 쉽게 내 나이를 가름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서다.
감각을 잃지 않도록 디자인 관련 잡지나 다큐멘터리는 꼭 챙겨 보는 편이다. 모두가 뜨거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유지하기 위한 감각 훈련이다. 같은 노래를 수백 번씩 반복해서 듣기도 하고, 좋아하는 드라마는 모아 두었다가 날을 잡아 시리즈를 한 번에 끝내버린다.(이런 경우는 뜨거움에 속한다.)
좋아하는 사람과는 자주 시간을 쓰고, 싫은 사람과는 가끔 밥을 먹는다. 싫어하는 사람과 차를 마시는 일은 거의 없는게,(이런 건 차가움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밥은 먹느라 눈을 마주칠 일이 많지 않지만 차는 시간을 남겨 두고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예민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지만, 이런 나를 근거없이 바꾸고 싶지는 않다. 지금까지 이렇게 까칠하게 살아왔는데, 좀 더 유지한다고 해서, 깊어지는 것 외에 뭐가 있겠는가.
나는 브롬톤, 프라이탁, 아크네 스튜디오, MM6, 메종마르지엘라 같이 대부분 유니크한 브랜드를 좋아한다.(좋아하는 것과 자주 산다는 건 다른 뜻이다.)
하지만 시장표 고무 바지와 거리를 지나치다 운명처럼 만나는 이름 모를 보세 제품에도 자주 심쿵한다. 해외를 나가면 H&M이나 자라 같은 대형 매장에도 꼭 들린다.(국내 보다 특이한 옷이 많아서다.) 날씨가 좋은 날은 동묘를 돌아다니며 보물을 찾고, 뜨끈한 쌍화차 한 잔을 들이키고 온다.
가끔 바람도 쐴 겸 경기도에 있는 대형 구제삽으로 차를 타고 사재기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늘 미니멀리즘을 외치지만, 실상 나는 지독한 맥시멀 리스트다.
오랫동안 애정하려면 족보를 따져보듯 어떤 브랜드인지도 중요하겠지만 (너거 아부지 뭐하시노~) 지금 바로 내 앞에서 강렬하게 시선을 끄는데, 어떻게 모른척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아우라'를 가진 제품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Beloved Bra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