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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t yet Oct 09. 2024

나는 보라색 입니다.



Purple.


"어떤 색 좋아하세요?"


이런 흔한 질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저는 보라색을 좋아해요.'라는 식의 대답을 하지만 청보라인지, 붉은 보라인지 구분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모든 보라색을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데, 하나의 색이 아닐 수 있는데 말이다.


특정 색을 좋아한다지만, 온도차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거나 유심히 바라보지 않는 것 일 수도 있다. 심지어 자신이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도 적잖게 많은 것 같다.


물론, 좋아하는 색이 없을 수도 있고, 모든 색을 좋아할 수도 있다.



나는 색감에 있어서 상당히 예민한 편이다. 유별난 후각과 촉각, 청각이 시각에도 영향을 미친게 아닐까 싶다.


사람마다 피부톤에 따라 쿨톤과 웜톤으로 구분해 바르는 베이스 컬러도 다르게 사용한다. 색에도 피부처럼 다양한 온도차가 있다.


같은 흰색이라도 형광등 색처럼 아주 쨍하고 차갑거나, 아이스크림처럼 따뜻한 색도 있다. 아기를 닦아줄 때 사용하는 보드라운 수건처럼 파우더리하거나, 드라이아이스처럼 시원한 색도 있다. 늘어놓자면 끝이 없다.


적어도 좋아한다고 말할 정도이면 컬러 코드 까지는 아니더라도, 느낌 정도는 덧붙일 수 있으면 좋겠다. 피부톤을 찾듯이 말이다.



오래전부터 보라색을 좋아한다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녀서인지 내가 보라 덕후인 것을 주변 대부분이 알고 있다.


과거 사업을 하던 시절에도 회사 티와 명함, 모든 CI를 보라색으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지인들이 내게 선물을 할 때면 보라색 꽃이나 보라색 물건 등을 보내곤 한다. 반복된 학습의 결과이리라.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일이 아니면 잘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 기억 상실증을 앓고 있다. 말하지 않는데도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쟁이 심보라고 생각한다. 굳이 말을 해야만 안다. 물론 유명인쯤 된다면야 본인도 알지 못하는 취향까지 누군가 찾아내겠지만 말이다.


얼마전 제니의 옷에 붙은 밥풀을 찾아낸걸 보고 진심 깜짝 놀랐다.(다들, 밥풀 조심하세요~)



나는 보라색 중에서도 청빛이 띄는 보라색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채도가 낮지 않고, 짙은 파랑에 가까운데, 차갑고, 지적인 보라색이다.


언젠가 친한 동생이 '이거 언니가 좋아하는 보라색이네?'라고 물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보라는 조금 더 차가워'라고 대답했다. 뭐가 다르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는데, 이제는 그녀도 적당한 온도차를 알아 챈 것 같다.


한 번은 블루베리를 먹다가 테이블에 흘렸다. 얼른 휴지로 닦았는데, 과즙이 이내 스며 들었다. 서서히 붉고 파랗게 물들어 가는 것을 보며, '이거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이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날따라 블루베리 색이 더 차갑게 느껴졌나 보다.



나는 비가 오는 날을 유독 좋아하는데, 그러다 보니 우산의 컬러에도 신경을 쓰는 편이다. 마치 옷을 입는 것과 같은데, 마음에 드는 보라색 우산이 없어서 오랜시간 찾아 헤매야만 했다.


얼마전 우연히 만난 금쪽 같은 녀석을 사용 후에는 닦고 말려주며, 아기자기 보살피고 있다. 길을 가다 보라색 우산을 들고 신나게 걷는 여자를 발견한다면, 그게 나 일 수도 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세심하게 구별하는 사람은 드물다. 또 대책없이 좋아하기에는 굉장히 예민한 색이다. 어쩌면 파랑과 빨강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없는 색일지도 모른다.


잘 못 사용하면 촌스럽고, 붉은 톤이 짙으면 자주색이 되어 버린다. 흰색을 많이 섞이면 여리여리한 베이비 감성으로 변해 버린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보라색 취향도 조금씩 바뀌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수십 가지의 보라색 중에서 이름을 지우고 봐도 같은 톤의 보라색을 골라내는 것을 보면 취향은 타고난 감각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게 아닐까싶다.


예민하고, 까다롭고,

그래서 보라색은 나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내가 보라색을 닮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는 보라색인 것이다.


'나는 보라색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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