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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화를 낼 줄 알아야 한다

몸이 잘린 지렁이

by 세성

벌써 3년 전이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의 번호를 차단했다.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그녀와 내 사이에 있었던 아슬한 사랑과 증오는 3년 전에 죽었다.





"이제 핸드폰 요금도 안 내줄라고 하냐!"


다짜고짜 따지고 드는 할머니의 음성이었다. 그것 또한 3년 만이었다. 3년 만에 전화해서 한다는 말이 고막을 찢는 꾸짖음이었다. 황당했지만 자초지종을 물었다. 요지는 나는 영문을 모르는 어떤 우편물이 집으로 날아왔는데 그것이 휴대폰 요금 고지서라는 것이다.


일단 사실을 파악해야 했다.

통신사에 전화를 걸어 문의를 했다. 결론은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정상적으로 내 계좌에서 할머니 휴대폰 요금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 것인가. 그 고지서의 정체는 무엇일까. 볼 수가 없으니 경을 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대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하는데 무슨 소리야. 나 모르는 일이야."


노력했다. 침착하려고. 말리지 않으려고. 알아듣게 설명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네 X이 이제는 그것도 안 해줄라고! 안 해줄라고!"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내 손으로 휴대폰 바꿔주고 몇 년을 요금 내주고 있는 거?

차분하게 해명한 거?

아니면.

.... 원하지도 않는데 세상에 나온 것?


아무리 말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자기 할 말만 했고 심장에 칼을 꽂는 험한 말만 골라서 했다.


"너, 너 600만 원! 내 600만 원 가져간 것 내놔! 안 내놓으면 경찰 데리고 네 집에 쫓아갈 것인 게!!!!"


끝이다. 돈 이야기가 나왔으면 가족 관계는 더 이상 예전 같아질 수 없다.

참을 수 없었다. 어차피 몇 년을 연락 안 하고 지냈는데 아쉬울 것 하나 없었다.


"나한테 왜 그래 진짜! 마음대로 해! 나야말로 경찰 부를 테니까!!!!"


사자후였다. 나도 처음 보는 내 모습을 그날 봤다.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른 뒤 전화를 끊었다.

무서웠다. 내 모습이 무서웠고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순간에 온몸이 떨렸다.


그때 나는 새로이 마음을 다 잡고 새로운 방향으로의 시작을 앞둔 시점이었다. 시작은 없었다. 내 인생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흐느끼는데도, 한편으로 너무너무 시원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맞서 싸웠다. 몸이 잘린 지렁이처럼 빠르게 몸부림쳤다. 희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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