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성 Oct 23. 2024

명절은 상처만 받는 날

혼자 보내는 게 속 편한 날

철이 든다는 건 몰라야 될 걸 알게 되고 보지 않아도 될 눈치를 보게 되고 안 보였으면 좋겠는 게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철이 들지 않았음 했다.




마지막으로 명절날 갔던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본가와 가까운 곳에서 일을 했을 때도 가지 않던 명절은 완전한 독립 이후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것 같다.


키가 크고 2차 성징이 옴으로써 꽤 어른의 모습을 갖춘 나는 더 이상 놀기만이 허락되지 않는 명절을 맞아야 했다. 작은집 식구들이 오면 상차림을 도와야 했고 읍내에 사는 큰아빠가 와도 상을 차려야 했다. 군에 사는 고모네 식구가 오면 또 새로 상을 차리는 것을 도왔다. 나는 그것이 내가 여자였기 때문에 그래야만 했다고 여겼다. 그 행위가 싫어진 것은 대학생 때부터였다.


나도 애이고 할머니, 큰엄마, 고모도 사람인데 나를 제외한 큰 아이들과 남자들은 가만히 앉아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차려진 음식만 먹는 게 속이 상했다. 꼴 보기가 싫었고 화까지 났다.


"살 좀 쪄라."


오랜만에 보는 작은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살찌라는 외모에 대한 얘기였다. 할 이야기가 그렇게 없는가.

이렇듯 우리 집도 여느 친척들과의 만남처럼 시답잖은 이야기만 오가는 겉으로만 화기애애한 집이었다.


"학교는 언제 졸업하니?"


"병원은 어디 갈 거니?"


"남자친구는 있니?"


"어느 병원 다니니? 월급은 얼마나 되고?"


이 이야기가 듣기 싫은 건, 질문에 대한 답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간섭을 한다는 점에서였다. 응원은 못해줄망정 부정적인 말들만 늘어논다는 말이다.


그것이 내가 명절에 집에 가지 않게 된 첫 번째 이유다.



-




또 다른 이유는 가족이 아닌 가족에서 오는 혼란스러움에 고통스러워하고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애써 무시하고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어릴 때와 같이 여전히 나와 아빠네 식구는 명절 때만 만났다. 달라진 게 있다면 크면 클수록 이별을 받아들였고 울거나 매달리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그 슬픔이 겉으로 티를 안 낸다고 하여 속에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과 슬픔의 결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그땐 나를 데리고 가줬으면 하는 간절이었고 지금은 나는 결국 그들과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확인하는 과정에서 오는 씁쓸함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 가족의 형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그리 오래돼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만남은 당연하지 않았다. 3박 4일 동안의 억지 가족. 361일 정서적인 교류도, 물리적인 교류도 없다가 갑자기 가족이 되는 가족. 그것이 내겐 아주 만나지 않는 것보다 더 잔인한 일이었다.


"하늘이가 닭껍질을 좋아해요."


설날, 아빠는 여동생에게 닭껍질을 골라 닭죽이 담긴 그릇에 담아주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왜 나도 좋아하는 닭껍질이었을까.


초라해졌다. 그는 그 아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몇 학년 몇 반인지, 어떤 친구와 친한지 알게 되는 동안 나에 관한 건 알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런 초라한 기분이 드는 순간 나는 좌절감을 느꼈다. 그밖에 그가 동생에게 스킨십을 하며 예뻐하는 걸 볼 때마다 나는 여기에 왜 있는가에 회의감이 들었다. 질투가 아니었다. 괴로움이고 상처고 분노였다.


그런 애매한 포지션이 더욱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나는 성인군자도, 이전의 순종적이었던 미성숙한 아이도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표현해야 했다. 티 내고 싶었다. 그래서 더 세게, 더 무심히 대했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로 가시를 박았다. 그게 내가 괴로움에서, 비참함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발버둥이었다.


그리곤 아예 보지 않기를 택했다. 가까이 살 때는 일부러 명절 전이나 후에 내려갔고 독립한 후로는 가지 않았다. 내게 명절은 그저 쉬는 날이 되었다. 내 집에서 맘 편하게 아무 간섭 없이 먹고 자고 할 수 있는 날.

그렇게 나는 완전히 일 년에 두 번 있을 상처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경제적, 정서적 독립이 나를 구해준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이전 07화 네 잘못이 아니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