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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성 Oct 31. 2024

내가 놓는다고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

지나친 책임감

내가 엇나가지 않았던 건 절반은 눈치가 보여서, 절반은 나를 위해서였다. 나는 자신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 찰과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컸다는 것이 내가 내세울 수 있는, 떵떵거리며 말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카드였다.






그녀와 나는 세대차이를 뛰어넘어 성향 자체가 맞지 않아 자주 싸웠다. 좋을 때도 많았지만 감정이 상할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키워준 사람을 배반한 나쁜 년이 된 것 같아 죄책감에 힘들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녀의 쏘는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참았다. 아니,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안 후에 그렇게 했다. 그게 방법이었다. 그런 내겐 하나밖에 없는 보호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그 보호자를 보살펴야 한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보호자는 나이가 들었고, 종종 아프니까. 그런 상황에서 나를 키웠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일찍이 밥상을 차리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널고 개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아이였다. 조금이라도 말을 듣지 않으면 친척들이, 이웃들이, 나아가 온 세상이 나를 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엇나가지 못했다.


나는 긴 역사를 함께 지내면서 내게 헌신적이었지만 바라는 것도 많았던 그녀에게 돈을 벌면 효도하고 싶었다. 감사함을 그녀가 좋아하는 돈으로 갚고 싶었다. 그래서 취직하자마자 용돈을 보냈고 한 달 반 만에 그녀에게 모진 말을 듣고 첫 병원을 그만뒀을 때도 하던 대로 했다. 매달 돈을 보내고 어버이날도 챙겼다. 하지만 그 효도는 3년을 채 가지 못했다.


첫 병원 퇴사 몇 개월 뒤 본가로 돌아와 2년간 근처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그녀와 난  나쁘지 않게 지냈다. 문제는 내가 도시로 올라간 뒤였다. 언제나 갈등의 불씨가 됐던 건 직장문제였다. 결국 그 불씨가 내 두 번째 트라우마의 발판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과도한 책임감에서 벗어난 계기가 된 발판이었다.



-



나는 소위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래서 함부로 입씨름하지도 못했다. 갈등 상황이 싫었고 내 의견을 굽히는 것이 그나마 나은 방법이었다. 그것은 타고난 기질과 가정환경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성향이었다.


그래서 심심치 않게 할머니와 냉전 기간이 시작돼도, 얼마 가지 않아 풀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매일 얼굴을 보고 함께 밥을 먹어야 했고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니까. 서로 말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맞닥뜨리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나는 할머니가 무서웠다. 그 싸늘한 눈빛, 어떤 말을 뱉어낼지 모르는 입술. 참기 싫어 조그마한 대꾸를 했다가도 계속 불안했다. 

그러나 그땐 달랐다. 상황이 바뀌었다. 더 이상 할머니와 국가가 지원해 주는 돈으로 살지 않았고 매일 같은 공간에 있지도, 얼굴을 보지도 않았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했던가. 몸이 멀어지는 것은 어쩌면 내게 기회였을지 모른다. 


그즈음 나는 그녀에게 매일 전화하는 것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먼저 걱정 어린 연락을 받고 수화기 너머 음성으로 사랑을 느끼지 못한 내가 주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 어색하고 억울했다. 무엇보다 나는 받는 것이 지속돼야 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루만 전화를 안 해도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것이 내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치 의무처럼 전화를 건 그날.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


간호사라는 직업 상 이직이 꽤나 쉽다. 더구나 난 그 직업에 큰 야망도, 열정도, 욕심도 없었다. 오히려 다른 곳에 눈이 팔려 있었다. 그래서 내게 이직은 흔한 이슈였다. 그때도 다니던 요양병원을 그만두고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숨길 이유도, 숨기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곧이곧대로 그녀에게 그 사실을 전달했다. 알면서도 항상 바랐던 것은 이해와 격려였다. 하지만 그녀가 내게 준 것은 욕지거리들이었다.


지렁이가 꿈틀 하다가 발작을 일으켰다. 나는 조용한 지렁이였다. 많은 사람들 사이를 소리 없이 지나가는 지렁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르는 지렁이.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욕지거리에 반응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반항했다. 이제 그녀에게 안부를 물을 일은 없으리라. 혹여 전화가 오더라도 받지 않으리라. 제발 나를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제발. 


그것이 내겐 엄청난 용기였다. 


노년을 나를 위해 산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그녀에게 나의 반항은 엄청난 영향일 테니까, 나와 틀어진다면 식음을 전폐하고 극단적으로는 어떤...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지나친 책임감이었고 그 책임감을 놓아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몇 개월이 흘러 고모로부터 들은 할머니의 소식이었다. 내가 없어도, 자신의 마음에 못을 박아도 그녀는 일상생활을 해내고 있었다.


그 일로 나는 오히려 편해졌다. 홀가분해졌다. 매일 의무적으로 전화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마음대로 이직해도 되었다. 진짜 내 인생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나'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가여운 지렁이는 남 생각만 하며 살았구나. 자신을 돌보지 않았구나.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일이 잘 풀리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던 어느 날,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아침,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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