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애를 치우홍구(秋紅谷)에서 처음 만났다. 치우홍구는 고층빌딩이 즐비한 타이중 도심 한가운데에 움푹 파인 모양으로 조성된 공원이었다. 한자를 풀면 ‘가을이 붉은 골짜기’라는 의미였는데, 골짜기는 공원 안의 저수지를 말하는 거라고 해도, 가을이 붉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겨울에도 웬만해선 10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이 나라에 단풍이 있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 애를 만난 11월에도 나무들은 눈이 부시게 푸르렀고 가을은 요원했다. 우리는 아침부터 내리쬐는 햇빛을 피해 나무 그늘이 진 벤치에 앉았다.
그 애와 나는 언어교환 어플리케이션으로 알던 사이였다. 채팅한 지가 한 달이 조금 넘었는데 사는 도시가 달라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 애가 타이중에 올 일이 생긴 그날 나는 하필 타이베이에 가야 해서 이른 아침 한 시간 정도밖에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중국어가 서툴렀을 때라 대화가 잘 될지 걱정이었는데 생각보다 그 애의 한국어가 유창했다. “한국에서 친구가 남편이랑 대만으로 여행을 와. 그래서 오늘 타이베이에서 만날 거야.” “네 남편이 온다고?” 이 정도 오해가 있긴 했지만 말이다.
그 애는 자신을 객가족이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중국어, 대만어, 객가어, 영어, 한국어 등 5개 국어를 할 수 있다고 했다. 한국 사람은 기껏 해야 서울 사람, 충청도 사람 등으로 나뉘는데 대만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았다. 객가족이 뭔지 짐작도 되지 않아서 그 애가 고향에 내려가면 화려한 전통 옷을 입고 전통 가옥에서 지내는 건 아닌지 잠시 상상했다. 나중에서야 객가족이 대만 인구의 13퍼센트를 차지하고, 교육열이 높고 검소해 동양의 유대인으로 불리며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도 객가족 피가 섞인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색했던 한 시간이 지나고 고속기차 역으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 애는 오토바이로 나를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그 애가 건네준 하얀색 헬멧을 받아 뒷좌석에 올라탔다.
오토바이 탑승은 처음이었다. 오토바이라기보다 스쿠터에 가까운 것이었는데도 그게 얼마나 빠른지 감이 없어서 죽지 않으려고 거의 껴안다시피 뒤에서 그 애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이십 분 정도 달리고 기차역에 내렸을 때 뒷목과 어깨에 뻐근한 통증을 느끼면서 내가 한 짓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아까 공원에서 있을 때보다 그 애가 훨씬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겨우 “태워줘서 고마워. 잘가” 하는 횡설수설을 하고 기차를 타러 갔다.
나중에 길을 걸으며 오토바이 뒷좌석에 탄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해보고 나서야 나처럼 들러붙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민망해졌다. 대부분은 앞 사람의 허리를 가볍게 잡거나 오토바이 뒤쪽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대만 드라마〈속녀양성기〉를 보면 타이베이로 대학을 가는 딸에게 아버지가 오토바이 뒷좌석에 타는 법을 알려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도 그걸 미리 봤어야 했다.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놀러 나갈 때 남자인 친구가 너를 오토바이에 태울 수도 있어. 괜찮아, 타도 돼. 하지만 오토바이를 타는 건 위험하니까 조심해. 오토바이를 탈 때 이렇게 하면[뒤에서 껴안으면] 절대로 안 돼. 잡으려면 여기[어깨]랑 여기[허리] 그리고 여기[좌석 아래]를 잡아야 해. (…) 그리고 네게 흑심을 품은 남자가 있을 수도 있어. 그러면 이렇게 가속과 감속을 이용해서 아이스 홍차처럼 흔들 수 있어. 안 돼! 나쁜 자식. 이런 남자는 블랙리스트에 올려. 말도 섞지 마. 절대로 안 돼.”
그 애가 가속과 감속을 이용한 나쁜 자식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확실히 나의 탑승 미숙으로 불필요한 신체 접촉이 생긴 그날 이후, 우리는 몇 번 더 만나고 연인이 되었다. 그 애가 내게 장미 한 송이를 선물한 날 밤, 우리는 〈장미 장미 나는 너를 사랑해(玫瑰玫瑰我愛你)〉를 부르면서 까르륵 웃었다.
그 애 곁에서 고마운 일들이 참 많았는데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우리의 인연은 길게 지속되지 않았다. 이제는 대만에서 보낸 일 년이 하룻밤 꿈처럼 느껴지듯 그 애와의 추억도 점점 희미해진다. 손에 쥔 모래알처럼 빠져나간다. 가끔 손바닥을 열어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때면 어떤 음성이 떠오른다.
그 애는 나에게 “지은은 최고야”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칭찬보다는 지적이 후했던 부모님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면 잘하는 걸 더 잘하는 것보다 실수를 하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좋은 성적표를 받아왔을 때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을 때에도 부모님은 속으로는 나를 자랑스럽게 여겼을지는 몰라도 대단히 치켜세워주진 않았다. 사회에 나온 나는 스스로를 열심히 노력해야 중간이라도 가는 사람으로 생각했고, 누군가에게 잘했다는 칭찬을 받아도 그게 진심으로 느껴지기보다는 다음 번 결과에 대한 압박처럼 느껴졌다. 서른이 다 넘어서 부모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 그동안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도 나였고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도 나였다. 그런 나를 보면서 그 애는 최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난하고 외로운 마음이 흔들렸다. 그 애는 흔들리는 내 눈동자만큼이나 자신도 당황하고 있었다. 1 더하기 1은 2이지 다른 답이 더 있어? 한 치의 의심도 없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이 내 안의 깊숙하고 여린 곳을 찔렀다. 그 애는 한 번 더 말했다. “지은은 최고야. 그리고 예술가야.” 사람은 듣고 싶은 말을 들었을 때 눈물이 난다고 한다. 지금도 그 한 마디를 생각하면 눈물이 쿵 나온다.
하루는 치우홍구에서 지는 노을을 보았다. 아스러지는 태양의 붉은빛이 움푹 파인 지대를 감싸자 공원 전체가 빨갛게 물들었다. ‘가을이 빨간 골짜기’였다. 계절과 상관없이 하루 안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는 것이었다.
그 애와 나는 어떤 사계를 지났을까. 그 계절을 돌이키려 발버둥치고 싶진 않다. 단지 그 애가 내게 소중한 것을 주었듯 나도 그에게 소중한 걸 남겨준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는데, 가끔 나만 너무 받고만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