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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아 May 08. 2022

뚜벅이의 버스 타고 편백휴양림 가기

남해에 온 지 23일째.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남해에 오면 해봐야지 했던 것들도 거의 다 해봤다. 그간의 일상은 따로 남해 to do list가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잔했는데, 알고 보면 나 나름대로 소박하게 하나하나 메모장에 줄을 그어가며 해오고 있었다. ‘숙소 뒤 편백나무숲 평상에 누워 있기’ ‘대방산 정상에 오르기’ ‘회 실컷 먹기’ 등등. 오늘 메모장을 열어보니 아직 줄이 그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국립 남해 편백자연휴양림 가기’였다.


버스를 세 번 타야 하는 교통 문제 때문에 미뤄두고 있었는데, 어제 한바탕 비가 내린 뒤 맑게 뜬 해를 보자 오늘이야말로 휴양림에 가기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손바닥 보듯 훤해진 버스 시간표를 믿고 한번 가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우선 숙소에서 지족리까지 버스를 한 번 타고, 지족리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 다른 버스를 타고 독일마을 근처까지 갔다. 거기서 또 버스를 타고 휴양림까지 갈 수도 있었지만, 그 버스는 편수가 적은데다 마침 그 길이 바래길7코스(화전별곡길)의 일부라서 걷기로 했다. 2시간을 걸으면 휴양림에 도착이었고, 중간에 지나가는 바람흔적미술관이라는 곳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바래길7코스는 지금까지 걸었던 바래길(남파랑길) 중에서 가장 길이 잘 닦여 있었다. 산속의 흙길이나 바닷가를 따라 난 도로 길이 아니라 정돈된 공원 산책로에 가까웠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내산이라는 마을을 지나 화천이라는 강을 따라 걷는데, 어제 비가 오고 불어난 강에서 콸콸콸콸 시원한 소리가 들렸다. 공기 중에는 꽃의 단 냄새보다 푸른 나무와 수풀의 향이 짙게 났다. 여름의 향기였다.


예정대로 바람흔적미술관에 들려 사람들이 맛있다고 리뷰에 써놓은 청포도에이드를 한 잔 마시고 또 삼십 분을 걸어 편백휴양림에 도착했다. 안내센터 앞에서 주섬주섬 입장료 천 원을 꺼내는데 직원이 오늘은 ‘문화가 있는 날’이라서 무료라고 했다. 와! 그러고 보니 오늘은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은 영화표가 반값이라 종종 달력에 표시해놓고 영화관에 가곤 했는데, 알고 보니 휴양림에도 혜택이 있었다!


남해 이곳저곳에 편백나무가 많지만(숙소 바로 뒤에도 있지만), 휴양림은 확실히 편백나무 향이 진했다. 입구에서 산책로를 찾아 들어가려는데, 생활 한복을 입은 한 아주머니가 이쪽으로 와보라고 손짓을 했다. 여기 숲 해설사인 것 같았다. 해설사분은 나와 다른 관광객 세 명의 손에 편백 오일을 뿌려줬다. 그러고는 자신을 따라 목을 주무르라고 했다. 손바닥을 목뒤에서부터 감싸 끌어내린 뒤에 쇄골을 따라 또 한 번 훑어 내리라고 했는데, 거기에 찌꺼기가 뭉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손으로 한 번씩 쓸어줘야 노폐물이 몸 밖으로 잘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좋은 건강 팁을 듣고,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전망대로 올라가는 표지판을 보았다. 사람들이 후기에서 입을 모아 꼭 올라가 봐야 한다고 한 그 전망대였으나, 올라갔다 내려오면 5시 버스를 놓칠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 여길 다시 또 오겠나? 나는 편백휴양림이 아주 마음에 들었고 기분이 무척 좋은 상태였다. 그래서 약 1.5킬로미터 더 올라 전망대에 도착했다. 올라가서 본 것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남해에서는 조금만 높은 산에 올라가도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다. 그래서 보리암에서도, 대방산에서도 멋진 풍경을 보았지만… 여기 편백휴양림 전망은 또 달랐다. 겹겹이 포개어진 산마다 십자수처럼 빼곡하게 수놓아진 나무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한 뿌연 푸른빛이 손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었다. 카메라 줌을 당기면 왠지 멋이 없어지는, 먼 곳에 두고 볼 수 있어서 멋진, 탁 트인 풍경이었다. 그 모습이 눈에 질릴 때까지 앉아 있다가 내려왔을 땐, 당연히 집에 가는 버스는 떠난 뒤였다.


이제는 계획이 없었다. 일단은 숙소 방향으로 걸었으나, 만약 걸어서 간다면 5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이미 2만 보를 넘게 걸어 다리도 아팠지만, 무엇보다 해가 지고 캄캄해지면 위험할 터였다. 카카오택시 앱을 켜봤는데 잡히는 택시가 없었다. 콜택시를 불러야 하나, 하고 걷던 중 아주머니 두 분을 봤다. 농사 일하고 집에 가는 길인지, 일 복장이었다. 마침 그 근처에 버스정류장이 있어서 나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갖고 버스 시간을 물었지만, 역시나 버스는 아까 지나갔을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그냥 대화나 나누며 걸었다.


“저는 원래 부산에 사는데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려서 왔다 갔다 하면서 이렇게 농부 흉내를 내고 있어요.”

“올 수 있는 시골집이 있다는 거, 부럽기도 해요."

“맞아요. 요즘엔 개구리가 열심히 울잖아요. 밤에 나와서 한 번씩 듣고 들어가요.”


개구리 소리는 나도 오늘 천변을 걸을 때 들었다. 깨꼴깨꼴!!! 소리가 너무 커서 처음엔 풀 속에 괴물이 있는 줄 알았으나, 그럴 리는 없고 개구리 소리 같았다. 나는 어느새 개구리 소리도 모르는 듯했다. 아주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놀랍게도 버스 한 대가 지나갔다. 아주머니가 저 버스 지금은 올라가는데 다시 내려간다고 타고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버스를 멈춰 세우고, 기사님에게 행선지를 묻고 탑승했다. (남해만 그런 건지 시골이 대체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버스가 택시처럼 잘 서서 태워주신다.) 버스 창문 너머로 아주머니가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셨다. 나는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아주머니 덕분에 그 뒤로 어찌어찌 연달아 버스를 두 번 더 타고 숙소 근처까지 가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뚜벅이는 잘 물어보게 되고, 버스 시간표를 잘 숙지하게 되고, 많이 걷게 되고,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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