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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아 Apr 25. 2022

어디에 사느냐보다 누구와 사느냐

남해 한 달 살기가 이제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아쉬운 마음에 저번에 절반만 갔던 남파랑길36코스의 나머지 절반을 걷기로 했다. 속금산과 대방산을 지나 창선면사무소가 있는 읍내로 내려오는 길인데, 절반이라고 해도 돌아오는 여정까지 생각하면 너무 먼 길인 것 같아서 자체적으로 코스를 줄였다. 카카오맵 기준, 노란색은 차도, 흰색은 인도, 초록색은 산길이라서 지도를 확대해가며 걷기 좋은 길로 나름대로 코스를 만들었다. 스마트폰 없었을 때는 어떻게 여행을 했는지 모르겠다. 돌아다니기는 좋아하는데 길치인 나에게는 스마트폰과 지도앱이 너무 소중하다.


걸어가는 모든 길이 아름다웠다. 나무가 울창한 흙길을 걸으면서는 살짝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오늘은 최고 기온이 25도로 초여름의 느낌이 났다. 그래서인지 전에 못 보던 꽃들도 보였다. 여름을 알리는 수국도 피기 시작했다. 읍내에 도착해서는 빨간색과 흰색의 동백꽃이 한 나무에 같이 달려 있는 동백나무를 보았는데, 그중 몇 송이는 하나의 꽃송이에 흰색과 빨간색이 섞여 있었다. 그런 동백꽃은 처음이었다. 묘하게 삼겹살이 생각났다. 읍내에 나간 김에 농협 하나로마트에서 된장국을 끓이려고 감자, 팽이버섯, 두부를 사고 베트남 쌀국수 키트도 샀다. 빵빵해진 배낭을 메고 다시 숙소로 올라가는 길, 짜장면집 맞은편에 사람들이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꽃잎이 겹겹이 쌓인 노란색 작은 꽃이 한 아름 펴 있었다. 장미과 꽃인가? 이름 모르는 노란색 꽃을 핸드폰에 담아두고 숙소에 돌아와서도 자꾸 봤다.


숙소에 돌아와서 씻고, 빨래 돌려놓고, 된장국 끓어 먹고 이제 설거지를 하려는데, 아까 인스타그램에 올린 삼겹살색 동백꽃 사진에 아는 동생이 메시지를 보냈다. “머야ㅋㄱㄱㄱㅋ 진짜삼겹살이네.” 대만에서 만난 동생이라 나는 이렇게 답했다. “훠궈에 우화로우(*삼겹살의 중국어) 넣어서 먹고 싶다.” 그랬더니 동생이 자기도 훠궈부터 생각났다면서, 훠궈집에서 저렇게 고기를 꽃처럼 말아주지 않느냐며 추억을 상기시켰다. 이 친구는 지금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 중이다. 거기는 지금 몇 시냐고 했더니 시차가 1시간 밖에 나지 않는다고, 오후 4시라고 했다.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전화 통화를 하자며 본격적으로 수다를 시작했다.


우리는 대만앓이 동지이다. 대만 이야기만 해도 무한 수다가 가능하다. 지금 대만은 반딧불이 시즌. 재작년 이맘때쯤 우리 넷이서 반딧불이를 보러 간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우리 항아리 닭고기 먹고 식당 아저씨 차 타고 반딧불이 보러 간 거 기억난다.” 우리는 대만도 좋았지만, 그때 어울렸던 친구들이 정말 좋았다는 이야기로 통화를 마무리했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박제시키고 싶은 시절. 너희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걸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고, 늘 고맙다.


시골살이를 나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준비하는 옆방 언니와도 결국은 어디에 사느냐보다 어떤 주민들, 어떤 친구들과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옆방 언니는 시골살이에 진심인 만큼 시간이 날 때마다 동네 주민들과 대화도 나누고 밭일도 도와드리며 적극적으로 유대관계를 쌓고 있다. 하루는 숙소 1층에서 옆방 언니, 나, 숙소 사장님이 동시에 마주치면서 나는 옆방 언니의 남해 생활에 대해 자세히 엿들을 수 있었다. 옆방 언니는 그날도 고사리를 캐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장님이 오늘은 어느 집 일을 도와줬냐고 묻자 언니는 ㅇㅇ할머니집 고사리를 캐줬다고 했다. 완전히 붙잡혀서 4시간이나 일했다면서 허리가 너무 아프다고 했다. 사장님은 “고사리 좀 나눠주드냐?” 하고 물었고 언니는 그런 거 없었다고 했다. 곧 사장님이 흥분해서 말했다.


“일당으로 치면 사오만 원어치인데. 그 할머니 아무리 억척스러워도 그라지, 그건 아니지. 삼천포에서 사람 불러다가 쓰면 일당 10만 원 줘야 한다 아이가. 그 할매, 어디 빈 땅만 보이면 자기 땅 아니어도 막 고구마 심고 그란다. 엄청 억척스럽다잉. 그라고 남의 할아버지 꿰찼다 아이가. 그러고 일 년 뒤에 자기 할아버지는 충격으로 목 매달아 죽꼬. 동네 사람들 다 싫어한다. 그 할매.”


나는 나중에 그 할매를 실제로 봤다. 옆방 언니랑 짜장면 먹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언니가 바로 저 할머니라고 알려줬다. 할머니는 언니한테 또 일을 시키려는 건지, 그저 말을 걸려는 건지, 엄청나게 느린 속도로, 거의 제자리걸음으로 걸으셨고, 우리도 그만큼 느리게 걸었는데도 결국 우리가 할머니를 앞지르는 순간이 오고 말았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허리가 아파서 잘 못 걷겠다고 하셨다. 그 말이 내 귀에는 어리광처럼 들렸다. 억측인지는 몰라도 할머니의 눈에 그득한 외로움은 뿌리 깊어 보였다. 바닥을 파고 지하 몇 미터까지 내려간 듯했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과, 자신에 관한 추문이 떠도는 동네에서 죽을 때까지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문득 시골이 하나의 견고한 공무원 집단처럼 느껴졌다. 훌쩍 떠나기를 좋아하는 나는 그런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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