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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아 May 12. 2022

포기하는 용기

대만은 가지 않기로 했다 

결국 대만은 가지 않기로 했다. 어제 정오가 학교에 서류를 제출하는 데드라인이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러 보냈다. 대만에 가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가고 싶다. 하지만 17일 격리와(지금은 14일로 줄었다) 의무로 어학당에 다녀야 하는 조건이 아무래도 걸린다. 내게 돈이 넘치게 많다면 격리 호텔은 최고급으로 예약해서 호캉스 누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고, 일은 병행하지 않고 어학당 공부에만 집중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17일 격리는 감옥 생활처럼 갑갑할 것이고, 이후에 살 집을 구하는 것도 외국인과의 만남을 꺼려 하는 지금 대만 사람들을 생각하면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어학당 공부는 일이 없을 때는 문제없이 따라갈 수 있겠지만, 일이 들어오는 순간 겨우 낙제만 면하게 다니게 될 확률이 높다. 결국 이 모든 게 돈 문제라는 생각이 들면 너무 씁쓸해지까, 지금은 적기가 아니라고 마음을 고친다. 대만은 어디 가지 않으니까, 다시 갈 수 있겠지.


문 하나를 닫아버린 나는 마음이 착잡했다. 어렸을 때 개미가 고무줄 냄새를 싫어한다는 과학 지식을 듣고 그게 정말인지 실험해본 적이 있다. 지나가는 개미 위에 노란 고무줄을 떨어뜨려 고무줄 안에 개미를 가둔 것이다. 개미는 온몸을 부르르르 떨며 각기 춤을 추었다. 고무줄 한가운데에서 어느 방향으로도 가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했다. 거의 몸이 꺾일 것 같아서 그때야 나는 고무줄을 치웠다. 그런데 왜 지금 그 장면이 생각나는 걸까. 나는 다급하게 다른 문들을 두드렸으나 노란 고무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듯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맴돌기만 했다. 나는 갑자기 한국어교원 해외 파견을 알아봤고, 어느 출판사의 구인구직 공고가 뜨자 그곳에 다니는 아는 분께 거의 칠팔 만에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당연히 그분은 어리둥절해했다. 지원서를 넣으려는 거냐고 묻자, 나는 그런 건 아니라는, 아주 애매한 대답을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개미의 모습 그대로였다.


정신을 차리고 눈앞에 있는 일감부터 집중하기로 했다. 매일매일 정해진 양을 하지 않으면 마감일을 맞추기 어려우니까.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가지 않은 길과 그 길 너머의 보이지 않은 풍경을 상상하고 있었다. 난 뭘 놓친 거지, 뭘 놓아버린 거지, 잘한 짓인가. 오늘은 우연히도 대만에서 만난 친구들과 단체 영상통화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는 낡은 사진을 자꾸 꺼내어보듯, 삼 년 전 대만 생활을 여전히 곱씹어 추억했다. 너무 추억해서 미화 필터가 쓰인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한 친구가, 이것도 지긋지긋하지 않으냐며,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대만에서 만나서 새 추억을 쌓자고 했다. 물론 대만 정부가 관광을 열어준다면 말이다. 밤에 침대에 누우며 생각했다. ‘예전에 대만 워킹홀리데이를 갈 때는 정말이지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었지. 이번에도 무리해서 갈 수는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는 건, 어쩌면 예전보다는 지금 내 삶에 만족하고 있다는 뜻일 거야. 그것도 좋은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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