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번째 남해 일기
나는 일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생활 패턴이 아주 다르다. 일이 있을 때는 거의 하루 종일 일하는데, 시간 약속을 어기는 건 외주자로서는 치명타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마감일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이라고 함은, 9시간 이상으로 회사 다닐 때 일하던 시간 이상이다. 원고가 유독 어렵고 양도 많고 시간까지 부족하면, 아이고 죽겠다, 곡소리가 절로 나온다.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일하다가, 침대에 누우면 방금 전까지 머리가 각성되어 있던 상태이기 때문에 피곤해도 쉽게 잠들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도 생긴다.
남해에서 보내는 27번째 날인 5월 1일 오늘, 나흘 뒤에 마감을 해야 하는 원고가 있다. 보통 때라면 아침부터 노트북 앞에 앉아 일을 시작했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원고가 가벼운 에세이인 데다가 분량도 적어서 평소보다 여유가 있는 것도 있었지만, 시간은 만들면 만들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쓰고 나서 보니 왠지 애인한테 투정 부리는 말 같다. “바쁘다는 건 다 핑계야! 시간은 내려면 낼 수 있잖아!” 나는 실제로 나한테 투정을 부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일 있다고 하루 종일 일만 하는 건 무리야! 동네 한 바퀴 할 시간 정도는 낼 수 있잖아!”
그리하여, 일은 오후의 나에게 맡기기로 하고 아침밥을 먹은 뒤 바다를 따라 산책을 했다. 이 길은 숙소 근처에 바다 산책길이 없어서 아쉬워하던 내게 옆방 언니가 알려준 길이다. 풀이 잔뜩 자란 길을 한 번 건너야 하는데 언니는 어떻게 이런 길을 찾았는지 모르겠다. 언니는 밤에 맥주캔 하나 들고 걷는다고 하지만, 나는 아침에 걷는 게 물도 가득 차 있고 윤슬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바다 냄새를 폐에 담으며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금방 왕복 한 시간을 걸었다. 충전한 에너지로 집중해서 일한 뒤, 저녁에는 편의점에서 장을 봐왔다. 인스턴트 국을 데우고, 전자레인지로 초 간단 맛살 계란찜을 하고 맛김을 한 봉지 트니까 그럭저럭 맛있는 한 상이 차려졌다.
비록 한 달이고, 여행이지만, 남해에서 혼자 일도 하고 삼시 세끼 챙겨 먹다 보니 독립한 기분이 든다. 나를 돌보는 법, 나와 잘 지내는 법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