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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로 Jun 23. 2020

제가 소심한 사람이라고요?




제가 소심한 사람이라고요?




<예민한 게 아니라 섬세한 겁니다>의 저자 다키다 아키카즈가 말하는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 주변 분위기의 미묘한 변화를 잘 알아차린다.
- 타인의 기분에 잘 휘둘린다.
- 혼자만의 장소로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다.
- 소음에 예민하다.
- 상대가 왜 불쾌해하는지 바로 알 수 있다. 

항목을 하나씩 읽을 때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뭐야, 이거 나 관찰하고 쓴 거 아니지...?

 

그렇다. 나는 예민하고, 소심하다. 그 사실을 부정하려고, ‘난 세심한 거야!’, ‘난 섬세한 거야!’라고 외쳐 보았지만, 나는 세심하고, 섬세하고, 예민하고, 소심하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내 성격이다.


타인에게서 오는 자극에 예민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빠르게 피로를 느낀다. 새로운 관계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그래서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빠르게 다가오는 것도, 나를 싫어해서 티를 내는 것도 비슷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내가 그어놓은 경계선에 타인이 다가오려고 하면 무의식이 경보음을 울린다. (아이유가 부릅니다. "이 선 넘으면 침범이야, 삡-") 왜, 차량에도 충돌 감지센서가 달려있지 않은가. 물체와 부딪힐 것 같으면 경보음을 울리는 그거.


한 번은 어디다 고민 상담을 하기에도 민망하고, 고민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애매한 불편함을 느낀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자꾸 내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했다. 그에게 알려줄 것이 있어 잠시 내 자리로 와달라고 말했더니 우리 사이에 8cm 정도의 간격을 남기고 내 쪽으로 바짝 붙었다. 미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인간이 사무적으로 맺은 ‘사회적 거리’가 120~360cm 정도라고 하던데, 우리 사이는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저기.. 우리가 이 정도로 친했나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은 분주해졌다. 몸을 물리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처음부터 농담하듯이 "너무 가까이 오신 거 아니에요?"라고 할 걸. 뒤늦게 진지한 얼굴로 "너무 가까운데 좀 저쪽으로 가주세요." 하면 상대가 상처 받을까 걱정이 됐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제는 선을 넘는 사람들은 계속 그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사람, 만원 지하철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서 운동화 끝으로 내 다리를 툭툭 치는 사람, 사무실에서 너무 큰 소리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 허락 없이 남의 물건을 만지는 사람이 그렇다. 나는 무심한 사람과 상성이 영 좋지 않다. 나에게는 당연한 예의가 상대에게는 아닌 경우가 많다. 각자의 기준치가 다른 것이다.


내게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들은 대단한 악의를 가지고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게 나 같은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뿐. 본인은 다른 사람이 같은 행동을 했을 때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니 괜찮다고 생각했거나, 자신에 행동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궁금하다. 애초에 나만큼 신경 쓰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지 않다. 내 경우에는 대책 없이 참는 경우가 많다. 사소한 일은 나만 참고 지나가면 괜한 싸움으로 번질 일이 없다. 터놓고 말했다가 상대에게 무안을 주고, 사이가 어색해지는 것도 걱정이 된다. 그러니 내가 꾹 참고 만다. 차라리 큰 문제였으면 그러지 말라고 당부를 해볼 텐데 사소해서 그러기 어렵다.


그나마 지하철에서 가방으로 나를 자꾸 치는 사람, 다리를 넓게 벌려 1.5인석을 차지하는 사람은 다시 볼 일이 없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별 수 없이 자주 봐야 하는데 상성이 맞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는 너무나 어렵다. 특히, 그 상대가 회사 사람이라면 진지한 대화를 나누거나 불만사항을 지적하는 게 배로 어렵지 않은가.


유해한 사람들은 은근슬쩍 무례한 말을 던진다. 내가 편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는 못할 싫은 소리를 하고, 마음이 상할 말을 던지는데 서슴지 않는다. 대놓고 말을 하지 않아도 표정이나 몸짓으로 자신의 부정적인 기분을 표출하기도 한다. 


퇴근길에도 상대방의 표정이 생각나고, 무례한 말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어 여러 번 곱씹는다. 한두 번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도 반복되면 슬슬 지친다. 마음이 마모될 때쯤 최후의 수단으로 ‘거리두기’를 선택한다. 그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피곤해진 심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무례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최소한으로 반응한다. 누가 비난에 가까운 말을 하면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하고 건조하게 반응하고 지나간다. 사적인 대화를 먼저 건네지 않는다. 고작 그런 게 무슨 거리두기냐고 물을지 몰라도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생존수단이다.


새로운 사람에 대해 일정한 데이터가 쌓이기 전까지는 타인과의 거리를 세밀하게 조정할 필요를 느낀다. 충분히 친해지기 전에 타인이 내가 그어놓은 선을 함부로 넘는 게 싫다. 그렇다고 해서 남이 말 붙이기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 욕심일지는 모르겠지만, 편안한 사람이되,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고 싶다.


또 한편으로는 내 안녕이 다른 사람들의 배려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 각자의 선을 가진 사람들이 나의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배려해 주었다는 걸.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마음을 써 주었다는 걸. 그런 사람들 덕분에 오늘 하루도 안녕했음을 깨닫는다. 그러니 나도 타인의 선을 침범하지 않는, 타인의 안녕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사람이고 싶다.


주변에는 가급적 내 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둘 것. 나도 타인의 경계선 언저리에서 마음을 써주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소심한 인간의 유일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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