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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로 Mar 25. 2021

유토피아는 없다.



'주거지 선정의 우선순위'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유토피아는 없다.


은평구 새집은 나의 이상향에 가까운 집이었다. 넓은 통창으로 담뿍 들어오는 햇볕. 외부 소음과 현관의 먼지를 차단해주는 중문. 연식이 오래되지 않아 깔끔한 벽지와 플라스틱 새시. 밝은 오크 화이트 색의 바닥과 몰딩. 창문 너머 보이는 북한산 뷰까지. 다른 집에 살아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디테일하게 좋은 점이 여럿 존재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집에 살기로 한 것이 나의 최선이었고, 최고의 선택이었노라 자부했다.


그러나 새집에 대한 환상은 생각보다 이르게 깨졌다. 다름 아닌 집 앞 공사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위이이잉~"

재택근무 덕에 8시까지 단잠을 자려했으나, 오전 7시 30분경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왔다. 몸을 일으켜 베란다 문을 열어보았다. 우리 집 바로 앞, 더 정확히는 왼쪽 대각선 앞에 위치한 집을 허물고 있었다. 내가 들은 소음은 집을 철거하는 공사 차량과 포클레인 소리였다. 아침부터 인부들이 몰려 소란스러웠다.


안 그래도 빌라촌 사이에 뜬금없이 단독주택이 있어서 의아하긴 했다. 언덕 꼭대기에 있긴 하지만 저만한 부지에 빌라를 올리면 돈이 꽤 될 텐데도, 빈집에 쓰레기만 굴러다녔으니 말이다. 다들 지나가며 그 집 담벼락에 쓰레기를 버려 보기 흉했다. 폐가를 철거하니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물론, 머지않아 깨달았지만 그건 완전히 오산이었다. 철거가 끝난 후 바로 빌라를 짓는 공사가 시작됐고, 공사 소음은 굴러다니는 쓰레기보다 더 직관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집 앞에 있는 좁은 길목은 공사 차량과 흡연자들이 점거했다. 내가 자랑하던 북한산 뷰도 공사 천막에 가려졌다.


지척에서 들리는 공사 소음 탓에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는데도 창문을 열 수 없게 됐다. 창문을 열면 소음뿐 아니라 먼지, 그리고 담배 연기까지 우리 집을 침입할 게 뻔했다. 게다가 바로 앞 길목에 이름 모를 공사 차량이 즐비했는데, 차량 탑승자의 눈높이에 딱 우리 집 창문이 있었다. 창문을 열어놨다간 피차 원치 않는 아이컨택을 하게 될 터였다.


하루는 재택근무를 하는데 평소보다 소음이 컸다. 문을 슬쩍 열어보니 레미콘과 이름 모를 트럭이 여러 대 와있었다. 레미콘이 시멘트를 퍼 올릴 때마다 큰 소음이 났다. 쿵! 푸쉬식. 쿵! 푸쉬식. 어플로 소음을 측정해보니 80db이 넘어갔다. 이중창을 닫아도 소리가 그대로 흘러들어와서 무선 이어폰을 끼고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사용했다. 쿵! 푸쉬식. 하는 소리는 이어폰 너머로 계속 들려왔다. 그때 직감했다. '최소 반년은 망했구나.'


이 공사 현장은 얼마나 부지런하게 돌아가는 건지 일요일에도 종종 출근하는 인부가 있었다. 오후 4시 반이 오기 전까진 주말에도 도무지 소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공사 소음은 내게 재택근무 포기와 이사를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교통비와 점심값 절약, 심지어는 늦잠도 잘 수 있는 재택근무를 차마 포기하지 못했다. 그나마 레미콘이 오지 않는 날은 소음이 그리 크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쉽게 된 건 테라스였다. 우리 집에는 1평쯤 되는 테라스 공간이 있다. 그곳을 아지트로 만들기 위해 갈대발로 울타리를 만들고, 파라솔과 캠핑 테이블, 그리고 캠핑 의자를 놓고 열심히 꾸며두었다. 봄이 돌아오면 잔디 매트도 깔 생각이었다. 화분을 여럿 들여 작은 정원처럼 꾸밀 계획도 있었다. 테라스를 예쁘게 꾸민 집은 내 오랜 로망이었다. 그러나 나의 로망 공간은 방치된 공간이 되고 말았다. 공사 현장과 너무 가깝고, 어차피 테라스로 나가봤자 공사 천막만 보였다. 내심 집을 잘 구했다고 자부하고 있던 터라 심히 당황스러웠다.


4년은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지만 4년은커녕 1년도 채우지 않고 이사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쯤 되니 다시 이사를 한다고 해서 이런 일이 없으리란 보장은 못 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누가 입주하고 얼마 안 돼서 바로 앞집이 허물리고 새 건물이 들어온단 상상을 할 수 있겠는가. 네x버 포털에 공사 소음에 대해 검색해보니 상당수 사람, 심지어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도 옆 부지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서 소음이 심하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이사는 깔끔히 포기했다. 어차피 계약 기간도 한참 남았다. 별다른 수는 없다. 공사가 하루라도 빨리 끝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사실 공사 현장과 가깝다는 게 이 집의 유일한 단점은 아니다. 테라스 쪽 벽에 곰팡이가 잘 생기고, 제습기를 틀지 않으면 실내 습도가 80을 넘어간다. 방음은 어찌나 안 되는지 윗집 주민이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친구들을 불러 모아 떠드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부실 공사로 인해, 위층 인터폰이 울리면 우리 집 인터폰도 함께 울린다.


결국 완벽한 집 같은 건 없다. 허물없는 사람 없고, 결점 없는 삶은 없듯이 말이다. 내 눈엔 모델하우스 같은 집에 사는 지인도 더 넓은 집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 집의 몇 가지 결점 같은 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존재일지 모르겠다. 내 이상향에 맞춰 상대를 파악하고, 필연적으로 실망하고. 그럼에도 이내 사랑하게 되고. 결점을 알게 되는 것도 이 집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 중 하나는 아닐까?


신림동 반지하는 뭐가 별로고, 용인 빌라는 뭐가 별로였다고 흉을 봤지만 어느 한 곳 사랑하지 않은 집이 없었다. 고시텔마저 사랑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고시텔이 위치한 동네만큼은 사랑해 마지않았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시원한 생맥주를 먹기 좋은 스몰비어 집, 치즈 불닭과 유자 꿀막걸리가 맛있는 주막, 우유 빙수가 맛있는 카페, 정든 우리 학교 캠퍼스가 있는 동네. 그곳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심을 틈타, 새로운 동네의 골목을 탐험하러 나선 날. 하얗다 못해 얼핏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목련과 담쟁이덩굴처럼 담벼락을 타고 늘어진 개나리와 나를 보고 후다닥 숨은 길고양이를 보았다.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이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나는 이 집을 여러 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게 될 거라고. 지금 사는 집도 언젠가 못내 그리워할 시절이 될 거라고.


그래도 주거지 선정의 우선순위에 '주변에 빈집이 있는지를 살피자.'라는 항목을 추가해야겠다. 그 지역이 투기과열지구라면, 빈집은 높은 확률로 철거되고 새 건물이 들어설 테니. 이 목록은 대체 언제까지 길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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