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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 소여 Jul 13. 2024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름다운 날들

9월 퇴사 후 3개월의 제주살이를 시작한지 어언 한달.

한 달에 한 번씩 3곳의 지역에 집들을 살아보도록 계획해 두었다.

제주를 한라산 중심으로 동과 서로 나누었을 때 지역별로 차이는 있지만

내가 느끼기엔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서쪽은 너무 분위기가 업되어 있는 반면,

동쪽은 인공적인 관광 시설물보단 자연 위주의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나와 더 잘 맞아 동쪽으로만 숙소를 잡았었다.



 ※제주 3개월살이 숙소 특징 정리

① 9월 조천 산간지역 리조트
  - 가격: 100만원 중후반대
  - 장점: 큰 온수풀장 갖춤, 가성비 좋음
  - 단점: 집이 좁고, 어린이집에서 40분 거리

② 10월 표선 2층 저택   
 - 가격: 400만원 가량  
 - 장점: 집도 잔디마당도 넓고, 표선 시내 인근으로 인프라多  
 - 단점: 가격이 사악함

 ③ 11월 남원 숲 속 주택   
 - 가격: 200만원 중후반대   
 - 장점: 빨간머리 앤의 집이 떠오르는 정원이 아름다운 집   
 - 단점: 깊은 숲 속이라 주변 인프라無 (배민 텅)

*공과금 미포함 가격

 

그리고 첫 번째 숙소에서의 마지막이 벌써 코앞으로 다가왔다.

충분히 관광을 하여서인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며칠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다시 돌아와 아침을 간단히 먹고

정원, 테라스, 바닥, 책상 등 마음이 내키는 곳에서 책을 펴고

읽다가 그 자리에서 낮잠에 빠져들고

잠에서 깨면 기타를 좀 치다가

배가 고프면 점심은 든든하게 먹기 위해 집 앞 식당가로 나가보고

나간 김에 근처 카페도 한 군데 들르고


그러다 아이들 하원시간이 되면

아이들을 픽업하여 집에 돌아와

수영하고

저녁 먹고

방에서 놀다가

자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또

책 읽고, 기타 치고, 수영하고...


                    

딱히 대단한 작가도, 기타리스트도, 수영 선수도 아니지만

무용해서 아름다운 시간들.


얼마나 오래 이런 무용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의미 없는 불안으로 현재를 잠식하지 않을 수 있는 소중한 나날들.


글쎄.. 이게 영화나 소설이었다면

꼭 이런 장면 뒤에 극적인 위기가 찾아오던데

삶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면서도

늘 드라마틱하기만 한 건 아니지 않나.


브런치글 조회수를 위해서 약간의 위기가 있는 게 더 좋으려나?.?






꿈꾸던 수영을 실컷 할 수 있던 제주살이 첫 번째 숙소.

아직 내 여행이 끝난 건 아니지만

이별은 새 만남의 즐거움과 별개로 아쉽다.



야간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제주의 첫날밤.

어둠과 피곤함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숙소의 첫 만남 속에

새벽에 도중 잠에서 깬 눈으로 마주친

창밖 야자 잎의 흔들거림.

그 할랑함이 주던 안도감.

그리고 그 잎사귀들이 방 안 벽으로 들어와 놀던 그림자의 바스락 거림.



건조기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막상 현실로 닥치니 당황스러웠던 순간이 무색하게

빨래를 너는 행위를 종교 의식처럼 성스럽게 만들어준 2층 베란다의 탁 트인 '들판, 바다 그리고 하늘' 뷰.



온 집 여기저기를 갤러리로 만든 율이의 낙서들.




사실 평수는 넓지 않아 불편할 수 있었지만

우린 그저 넓고 화려해야만 좋다고 생각하는

멍청이가 아니니까.


아름다움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서 새벽녘 떠오르는 일출처럼 스며드는 법.



안녕-

우리의 행복 가득했던

첫 번째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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