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비우기 feat 폼페이 벽화 플로라
고대 로마의 폼페이 벽화 플로라다. 좋아하는 그림이라 글을 잘 쓰고 싶었다. 의욕이 넘쳤다.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가는 무례한 사람처럼 말을 내뱉고 쏟아냈다.
나는 몇 번이나 글을 엎었다. 그림이 주는 여운이 커서 그럴까? 채우지 않아서 좋았던 그림인데, 나는 꽉꽉 채우고 있었다. 억지를 부리며 쓴다는 걸 나도 알았다. 잘 쓰고 싶은 욕심은 조바심으로 변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발행을 하루 앞둔 저녁에 마음을 바꿔 먹었다.
다 내려놓자. 마음 비우기가 먼저다. 폼페이 벽화 플로라는 홀가분한 그림이 아니던가.
그녀는 뒷모습만 보여준다. 뒷모습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그리지 않고 그리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가려진 대상을 볼 때 빈칸을 채우려는 본능이 작동한다. 수묵화의 여백과 비슷하다. 그리지 않아서 완성된 아름다움이다. 비어있는 공간에서 오는 여운은 보는 이의 몫으로 남겨진다. 크지도 않은 그림이지만 이 공간은 넉넉하게 열려있다.
이 그림은 폼페이 남쪽 해변의 휴양 도시, 스타비아에서 발견되었다. 초호화 별장이 줄지어 있던 곳이다. AD 79년 폼페이가 화산재에 묻힐 때 같이 묻혔다. 1759년에 발굴되었다.
하늘거리는 옷자락과 하얀 베일, 푸른 배경, 가벼운 맨발과 소박하게 핀 들꽃. 모든 것이 무심하다. 그녀의 일상은 목적도 의도도 없다. 삶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그저 이 순간이 존재할 뿐이다. 목적 없이 존재하는 플로라는 불안이 없다.
플로라의 눈길이 머문 곳, 스쳐 지나가다 잠시 발길이 멈춘 곳에 나도 멈추게 된다. 보는 이도 그 순간에 머물게 된다. 나는 우연히 그녀의 그 순간을 목격한 사람이다. 나는 그녀가 서있는 공간의 깊이를 느끼고, 찰나의 시간을 느끼며, 살랑이는 바람과 공기도 느낀다.
이 벽화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를 배경으로 한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에서 '마음의 소란이 제거되지 않고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마음의 소란은 욕망과 불안 때문에 생긴다. 마음의 소란이 제거되었을 때 아타락시아에 도달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의 쾌락과 단순한 기쁨은 채웠던 것을 비워냈을 때 경험하게 된다. 플로라는 그런 아름다움을 그린 작품이다.
아타락시아(ataraxia, 정신적 평온, 불안의 부재))는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마음을 비워서 본래로 회귀했을 때 경험하는 각성의 상태다. 나는 미술 작품을 핑계 삼아 명상의 이로움과 명상이 도달하는 곳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명상과 거리가 멀었다. 짧은 에세이 하나를 쓰는데도 내 능력보다 잘 쓰고 싶은 허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플로라의 뒷모습은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멋들어진 해석으로 나를 돋보이게 하고 싶었다. 명상하는 것이 아니라 명상하는 것처럼 보이게 위선을 떨었다.
플로라는 뒷모습을 보여줬을 뿐인데, 나는 나를 가로막는 욕망의 벽을 보게 되었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나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은 그나마 그동안 명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다행스럽고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