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그의 이름, 그의 그림, 불행한 생애까지, 최소한 귀를 자른 사건 정도는 어지간하면 다 안다. 그는 그림을 그렸던 10년 내내 홀대받은 화가였다. 그리고 그림을 인정받기 시작하던 찰나에 생을 끝냈다.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했던 반 고흐, 불행 밖에 없을 것 같은 그에게도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까?
위의 헤이그 풍경화는 처음으로 그림을 배우던 때의 그림이다. 싹둑 잘리고, 깊숙이 패인 나무가 위태롭게 홀로 서 있다. 그리고 황량한 들판과 외로운 길 위로 한 사나이가 걸어간다. 이 풍경은 반 고흐의 내면세계와 동일하다. 그에게 그림이란 아무도 거들떠봐주지 않는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반고흐는 집안의 골칫덩이였다. 그는 자신을 '길거리로 내쫓긴 개'라고 느낄 만큼 불행했다. 아버지는 엄격하고 냉혹했다. 그래서 황야를 떠돌 때보다 집에 돌아갔을 때가 더 외로웠다고 편지에 쓰기도 했다. 반 고흐는 가슴에 숭숭 뚫린 구멍을 그림으로 메꾸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내면에서 색채의 힘이 꿈틀대는 것을 느낀다 (1882년 편지) 했다. 그림은 생에 대한 열정을 느끼게 되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의 불행은 그의 자산이 되었다. 혼신을 다한 붓터치는 수많은 이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의 그림은 살아있다. 그가 죽고 지금까지 순수한 열정은 시공을 넘어 전해졌다. 그의 불행은 먼 훗날 우리에게 힘이 되었다. 그의 그림은 우리 모두의 자산이 되었다.
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허락된 것은 그림뿐이었다. 그림은 삶의 전부가 되었다. 반 고흐 그림의 진정성과 진한 감동은 여기서 나온다. 그는 불행했지만 그 불행 때문에 자기 삶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탄광촌 사람들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감자 먹는 사람들>의 가치를 알았다. 그는 이 그림에 애정을 쏟았다. 접시를 내미는 바로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사실과 정직하게 노력해서 얻은 식사를 그리고 싶다 했다. 그의 그림에는 가난은 있어도 거짓이 없다.
나도 불행하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그때는 갈등이 있으면 불행하고, 갈등이 없으면 행복한 인생인 줄 알았다. 또 결핍이 불행이고 소유가 행복이라 생각했다. 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갈등 없이는 성장도 없었다.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면 불행했으나 막상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반대로 결핍은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알게 하고, 소유가 불행일 수도 있음을 알게 하였다. 이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의 삶은 훨씬 성숙하고 풍요로웠을 거다.
그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꼈다.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밑바닥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동정하지 않고 업신여기지도 않았다. 그는 불행한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껴안는 연약함과 순수함이 있었다.
1882년 겨울, 반 고흐는 차가운 길바닥에서 창녀 시엔을 만났다. 그녀는 임신한 채 버려졌고, 어린 딸을 데리고 있었다. 가장 보잘것없는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났고, 서로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지.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고 있다. 그게 바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꿔주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만하게 해주는 힘이 아니겠니....
그녀와 그림이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 그녀는 신의와 헌신으로 가득 차 있어서 나를 감동시킨다.
1882년 6월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예담, 2014
그는 시엔의 어머니와 두 아이까지 보살폈다. 이 일이 알려지자 테오는 생활비를 끊어버렸다. 시엔은 다시 거리로 나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반 고흐와 헤어진 1년 후 시엔은 강물에 몸을 던졌다. 그들만의 소중한 행복은 그렇게 끝이 났다.
동네 불량배도 낄낄대며 돌멩이를 던졌다. 그는 가족, 친지, 동네 사람 모두가 외면했던 사회부적응자였다. 사랑에 성공한 적이 없으며, 헌신적으로 일했던 탄광촌에서도 거부당했던 부담스러운 목회자였다.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고갱과 살게 된 것을 그렇게 기뻐했으나 고갱과도 헤어졌다. 너무 괴로워서 귀를 잘랐다. 고갱과 고흐는 서로에게 희망이자 절망이었다. 반 고흐의 강한 기질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와 5년간 우정을 지속하다 결별한 라파르트는 이렇게 썼다. 이 불행한 사나이의 진가를 그는 알고 있었다.
빈센트는 일상의 측면에서는 전적으로 무방비 상태였고, 매 순간을 아슬아슬하게 견뎌나갔네. 그는 미치광이가 되었네. 분명 그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걸세....
빈센트가 원한 것은 숭고한 예술이었으며, 그것을 표현하려는 어마어마한 투쟁은 그 어떤 예술가라도 지치게 했으리라 생각하네. 나는 그의 광적이고 폭발적인 기질에 대해 우정보다는 존경심을, 동지애보다는 숭배감을 느꼈네.
1880.11.1, 라파르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반고흐 영혼의 편지 2, 예담, 2014
그 애를 위해 침실에 걸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아몬드 꽃이 만발한 커다란 나뭇가지 그림이랍니다.
1890년 2월 어머니에게 쓴 편지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예담, 2014
1890년, 늦게 결혼한 테오에게 첫 아이가 태어났다. 테오는 아들의 이름을 빈센트 반 고흐로 정했다. 그는 조카를 위해 아몬드꽃을 그렸다. 이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그림이 또 있을까. 훗날 반 고흐의 그림은 모두 조카에게 상속되었다. 조카는 삼촌의 그림을 모아 미술관을 만들었다. 네덜란드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이다. 반 고흐는 지금도 테오의 후손과 네덜란드를 먹여 살리고 있다.
그는 무료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테오가 보내주는 돈은 거의 물감과 모델비로 다 썼다. 그는 후회도 많았지만 후회할 시간이 없을 만큼 그림에 열중했다. 발작을 하면 그림을 못 그리게 될까 봐 스스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는 편지에 썼다. 발작을 하면 물감을 먹기도 했지만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끼리도 우정이 존재한다는 것, 서로를 받아들였고 이해한다는 것, 그들을 보며 광기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이 없어졌다는 것.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공포감도 많이 없어졌다는 것. 불평하지 않고 고통의 순간을 바라본다는 말도 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병과 사투를 벌였던 것 같다.
힘든 시간을 갇혀 지내면서도 그의 그림은 생명력과 숨 쉬는 공기로 가득했다. 그림에 놀라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살아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림 한 점이 400프랑에 팔리기도 했다. 반 고흐는 기뻐했다. 그러나 멋대로 쓰는 평론은 싫어했다. 그런 중에도 발작은 계속되었다. 1890년 7월, 밀밭에 총성이 울리고 반고흐는 스스로 모든 고통을 끝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 함께 한 가족은 흙과 풀, 노란 밀밭, 농부, 바람과 태양이었다.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그는 최선을 다했고, 몸 마음을 다 바쳤다. 반 고흐의 삶을 행복과 불행으로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충분하고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