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콘과 나와 J에 대한 명상
폭우가 쏟아지는 날, 어린 한강은 처마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때 한강은 경이로운 순간을 경험한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나로 살아가고 있었다'
-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소감, 2024.12.10
한강과 또래 아이들, 길 건너편 처마밑 작은 군중. 모두가 비를 바라보고 얼굴에 젖은 비를 느끼고 있었다. 저마다의 '나'로, 수많은 1인칭의 시점으로.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고통을 겪는다. 고통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그래서 남의 고통은 알기 힘들다. 또 자기가 겪는 고통이 가장 크게 느껴진다. 한 인간이 느끼는 1인칭의 고통을 처음으로 다루었던 작품은 그리스 헬레니즘 조각, 라오콘 군상이다. 생의 가장 어두운 밤을 견디고 있는 J에게 이 작품이 위로가 되길.
라오콘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잠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리스는 트로이와 10년째 싸우고 있었다. 이 전쟁을 끝장내기 위해 그리스가 계략을 꾸몄다. 트로이 목마였다. 거대한 목마에는 그리스 군사가 숨어 있었다.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은 이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그리스의 계략에 속지 말라고 부르짖었으나 소용없었다. 목마는 성문 안으로 들어갔고 그날 밤 트로이는 함락되었다.
신의 비밀을 누설한 라오콘. 포세이돈은 거대한 바다뱀을 보냈다. 뱀은 라오콘과 두 아들을 휘감아 물어뜯고 죽여 버렸다. 분노한 신은 라오콘을 죽였지만 그는 전설이 되어 살아남았다. 라오콘은 신의 뜻에 맞선 인간의 무력함, 운명에 맞선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징한다. 로마와 르네상스 미술, 19세기 로댕에 이르기까지,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라오콘의 비극은 공감을 자아내고 있다.
인간의 의지로 세계의 끝을 보려 했고, 인간의 힘으로 제국을 일으켰던 정복자가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그는 황제가 되고 10년을 전장을 누비다가 30세에 독살되었다. 그는 영웅이었다. 그러나 운명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정복의 시대, 대제국의 시대, 끊임없는 전쟁과 질병의 시대,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혼란의 시대였다.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고통에 직면했다. 삶은 내일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헬레니즘의 시대는 플라톤의 영원성을 담은 조각이 아니라 역동적인 순간의 진실, 격렬하고 무절제한 인간의 고통과 광기, 비극적인 감정을 필요로 했다.
헬레니즘기의 그리스인들은 불확실성과 폭력의 시대, 비명소리가 들릴 것 같은 격렬한 순간을 담아냈다. 연극의 한 장면 같았다. 그들은 라오콘의 절규와 고통에 공감했다. 이것은 그들이 고통을 객관화하는 방법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직시하려는 그들만의 용기였다. 운명과 고통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는 통로였다.
나는 20대에서 40대까지가 힘들었다. 세상도, 세상 일도, 세상 사람도 항상 내 생각과는 달랐다. 강물에 떠밀리듯 살았고, 견디며 살았을 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숨을 못 쉬고 죽을 것 같은 시간도 있었다. 그때는 모르고 겪었지만 후일 생각하니 공황장애였다. 명상을 하면서 막힌 숨구멍이 뚫렸다.
책은 큰 위로가 되었다. 시를 읽었고, 이순신의 생애를 읽었고,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뎠던 사마천을 읽었다. 성경의 욥기를 읽었고, 채근담과 노자를 읽었고 불경을 공부했다. 터널을 결정적으로 통과하게 해 준 것은 마음수련이었다. 내 인생 전체를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버리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음을 버린다고 무사태평한 나날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생로병사의 고해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폭력적으로 밀려오는 운명은 겪을 수밖에 없다. 물론 고통 자체가 삶의 목적은 아니다. 하지만 고통 없이는 깨달음도 없었다. 긴긴 어둠이 없다면 아침 햇살과 그지없는 행복과 깊은 고마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건 무슨 뜻일까. 강물에 떠밀려 가더라도 허우적거리지 않고, 침몰되지 않고 벗어나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띨 수 있고 온기를 잃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런 눈과 그런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는 말이다. 고마울 따름이다.
J는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금 막 통과하는 중이다. 왜 나만 이런 걸 겪어야 하나? 왜 나에게만? 1년을 서럽게 울고, 새벽 3시에도 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던 J다. 죽고 싶다, 떠나고 싶다는 말을 수십 번 반복했다. 단지 그런 중에도 성찰의 고삐는 놓치지 않았다.
어제 J가 전화를 했다. "내가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다는 걸 이제 알겠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고 지켜주고 있었다는 것도 이제는 알겠어요. 정말 고맙고 감사해요." J는 기어이 자기를 이겨냈다. 고통은 더 맑고 깊은 눈을 뜨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