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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ill Light Oct 03. 2022

재생 오류

움직이지 않는 코끼리


십 년이 넘는 긴 시간을 동물원에서 살다가 고향 제주도로 돌아간 남방 큰 돌고래들의 사연이 최근 화제의 드라마 때문에 다시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동물원 수조 안에서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던 다큐 영상 속 돌고래와 오버랩된 장면이 있다.


오래전 새 카메라를 사고, 사진을 찍으려고 동물원에 가서 보았던 코끼리의 모습이다. 

오렌지 빛에 드라마틱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날씨 좋았던 날 오후, 코끼리 한 마리가 바위 모형의 인공 구조물 아래서 벽 쪽을 바라보며 그대로 멈춰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코끼리의 모습이 이상해서 뭔가 다른 움직임을 기대하며 같은 자리에 한참을 지켜보았지만 코끼리는 오랜 시간을 그대로 멈춰있었다. 


육지에 사는 동물 중 몸집이 가장 크고 천적이 없는 코끼리는 보통 60~70년을 살지만, 동물원에 사는 코끼리는 평균 수명의 반도 못 산다고 한다. 사망원인은 비만과 스트레스, 좁은 곳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코리끼를 보니 충분히 이해가 된다.


코끼리는 무리를 지어 살고 인간의 수명과 비슷한 수명으로 사는 유일한 동물이며, 높은 지능으로 거울 속 자신을 인식하는 몇 안 되는 동물 중 하나이다. 죽은 동료를 추모하는 습성이 있는 영특한 동물이기도 하다. 이런 코끼리가 값싼 장식품처럼 무기력하게 있는 모습이 몹시 안타까웠다. 


코끼리, 북극곰, 돌고래와 같이 몸집이 크거나 지능이 높고, 특히 환경에 민감한 동물들은 동물원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 가까운 미래에 이런 동물들은 동물원이 아닌 VR 같은 가상현실 세상에서 보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무리를 지어 놀고 있는 코끼리들이 보인다. 
코끼리에게 다가가 보지만 코끼리는 내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걸어 다니면서 코끼리를 보고 실제 코끼리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가늠해보고 있다.
나는 늘 코끼리의 코가 궁금했다. 팔을 뻗어 코끼리의 코를 조심스럽게 만져본다. 코끼리의 피부는 생각보다 거칠거나 단단하지 않고 성긴 털이 나있다. 그런데 코끼리가 갑자기 엄청난 양의 똥을 쏟아내고 있다. 나는 서둘러 VR 버튼을 종료한다. 


현실의 코끼리는 주인공도, 배경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바위 모형 아래에 놓아둔 커다란 장식품 코끼리 같다. 

재생 오류, 다시 리셋 버튼을 눌러야 할 때이다.


혼자서 벽을 바라보며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고 있는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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