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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란도나츠 Aug 05. 2024

금요일 밤, 양파 썰다 응급실 간 이야기

비급여의 행복


지난 금요일 저녁, 오리불고기를 먹으려다가 하마터면 손가락 한 개를 날릴 뻔했다.


오리불고기에는 양파가 많이 들어갈수록 맛있다. 양파를 얇게 썰어야 금방 양념이 배고 단 맛도 빠르게 낼 수 있다. 오리 슬라이스 400g에 양파 반 개를 넣기로 했다. 2~3mm 정도로 가지런히 써는 게 좋다. 숙련된 셰프인 나는 대부분의 양파를 비슷한 두께로 썰어낼 수 있다. 이 때문에 잠시 나는 '비슷한 두께로 빠르고 정확하게 양파를 써는 나'에 심취했다.


하지만 셰프도 실수할 수 있다. 고로 나도 실수했다. 마지막 한 조각이 조금 두껍게 잘린 것이다. 4mm 정도 되는 아슬아슬한 두께, 그리고 아래쪽이 5mm 정도로 살짝 더 두꺼웠다. 자를 부위 바로 위에 손가락을 얹어 왼손으로 흔들림 없는 양파 지지대를 완성했다. 오른손에는 날이 잘 선 칼을 들고 왼쪽으로 약간 비스듬하게 망설임 없이 내질렀다.


하지만 각도를 잘못 맞추는 '셰프의 실수'를 또 저질렀다. 지지대 역할을 하던 왼손 새끼손가락에까지 칼이 들고 만 것이다. 찰나의 순간, 칼이 드는 느낌도 없이 손가락 1/3이 얇게 회쳐졌다. (의사도 '포를 떴다'고 표현하더라.) 다행히 끄트머리는 붙어있는 상황이었지만, 순간적으로 피가 흥건히 나기 시작했다. 모든 모세혈관에서 잘린 부위로 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상상을 위해 첨언하자면, 양파를 썰고 있던 칼이라고 해서 더 아리진 않았다.)


알고 있는 응급처치를 하려 했다! 그런데 아는 없는 것이다! 흥건히 피가 나는 사이로 조각만 대충 맞춰 손가락으로 누르고 "병원!"을 외쳤다. 잠옷을 입고 있던 터라 이래저래 어렵게 옷을 갈아입고 30분 만에 멀리 있는 대학 병원 응급실에 가게 된 것이다.


손이 베여 병원을 가본 적이 있는가. 지혈을 해보겠다며 움직이지도 않고 손이 저릴 때까지 잡고 갔는데, 의사들은 잘린 부위를 이리저리 헤집는다.(모르지만, 얼마나 다쳤는지 보는 것 같다.) 덜렁덜렁대는 손가락 포를 뒤집을 때마다 나는 저게 뜯겨나갈까 봐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그렇게 환부를 살피고는 스텐 바트에 소독 솜을 한가득 가져와서는 절단 부위 안쪽과 바깥쪽으로 솜을 굴려댄다. 거스러미가 난 것 마냥 이제 손가락에서 떨어져 있기로 결정한 것인지 자른 부위는 계속 덜렁댄다.


"아파요."


이 말과 동시에 선생님은 빨간약이 묻은 솜을 환부에 지그시 가져다 댔다. 상처에 닿는 빨간약이 얼마나 아픈지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았다. 잠깐 빨간 약을 묻히고 마는 줄 알았더니 5초 이상을 꾹 눌러댄다. 이럴 거면 "많이 아파요"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환부가 쿡쿡 쑤신다고 표현하기도 아깝다. 바늘 몇 개로 푹 찌르는 느낌이었다. 물론 나도 빨간약을 쓴 지가 하도 오래돼서 잊고 있었다. 그다음, 피가 안 통하게 손가락을 꽁꽁 묶는다. 고무줄이 아니라 니트로 장갑을 자른 것을 집게로 집어둔다. 의사가 들어와서 손가락을 또 보더니 피가 좀 통하는 것 같자, 이번엔 손가락 뼈가 아플 정도로 세게 묶는다. 만족한 것인지 다시 들어온 의사가 남은 피를 여러 번 거즈에 짜낸 뒤에 드디어 인체본드를 환부 위에 묻힌다.


(실로 꼬매기로 결정하면, 마취를 한다고 한다. 인체본드는 비급여로 응급실에서 4만 원 정도 한다. 나는 이럴 때를 위해 내가 돈을 버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통 대신 돈을 내기로 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게 베였으면 인체본드 옵션은 없다고 한다. 앞으로 손가락을 베일 예정이라면 조금만 베도록 하자.)

처치를 마치기 전까지 좀 무서웠다. 뭔 일이 날까 봐. 한밤중의 응급실에서 치료를 제때 받는 건 큰 운이기 때문이다. 큰 사고가 나거나 진상 환자라도 있으면, 나 같은 베임 사고는 취급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염려까지 계산해 마취를 하고 실로 환부를 꿰매는 대신 (시간도 오래 걸릴 테고, 상상만 해도 무섭다.) 인체본드를 선택한 나는 오늘 밤엔 (적어도 내가 치료를 다 받기 전까지는) 큰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다행히 처치도 잘 되어 다시 기분이 살아나자 슬슬 배가 고파 남아있는 재료로 오리불고기를 계속할지, 냉동 음식을 데워 먹을지 따위를 토론하며 집에 왔다. 도마 위 핏자국 하나 없이 가지런히 썰려있는 양파를 보니 질리는 기분이었다. 칼을 순간 손이 잘리는 기분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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