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불고기에는 양파가 많이 들어갈수록 맛있다. 양파를 얇게 썰어야 금방 양념이 배고 단 맛도 빠르게 낼 수 있다. 오리 슬라이스 400g에 양파 반 개를 넣기로 했다. 2~3mm 정도로 가지런히 써는 게 좋다. 숙련된 셰프인 나는 대부분의 양파를 비슷한 두께로 썰어낼 수 있다. 이 때문에 잠시 나는 '비슷한 두께로 빠르고 정확하게 양파를 써는 나'에 심취했다.
하지만 셰프도 실수할 수 있다. 고로 나도 실수했다. 마지막 한 조각이조금 두껍게 잘린 것이다. 4mm 정도 되는 아슬아슬한 두께, 그리고 아래쪽이 5mm 정도로 살짝 더 두꺼웠다. 자를 부위 바로 위에 손가락을 얹어 왼손으로 흔들림 없는 양파 지지대를 완성했다. 오른손에는 날이 잘 선 칼을 들고 왼쪽으로 약간 비스듬하게 망설임 없이 내질렀다.
하지만 각도를 잘못 맞추는 '셰프의 실수'를 또 저질렀다. 지지대 역할을 하던 왼손 새끼손가락에까지 칼이 들고 만 것이다. 찰나의 순간, 칼이 드는 느낌도 없이 손가락 1/3이 얇게 회쳐졌다. (의사도 '포를 떴다'고 표현하더라.) 다행히 끄트머리는 붙어있는 상황이었지만, 순간적으로 피가 흥건히 나기 시작했다. 모든 모세혈관에서 잘린 부위로 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상상을 위해 첨언하자면, 양파를 썰고 있던 칼이라고 해서 더 아리진 않았다.)
알고 있는 응급처치를 하려 했다! 그런데 아는 게 없는 것이다! 흥건히 피가 나는 사이로 조각만 대충 맞춰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 "병원!"을 외쳤다. 잠옷을 입고 있던 터라 이래저래 어렵게 옷을 갈아입고 30분 만에 멀리 있는 대학 병원 응급실에 가게 된 것이다.
손이 베여 병원을 가본 적이 있는가. 지혈을 해보겠다며 움직이지도 않고 손이 저릴 때까지 잡고 갔는데, 의사들은 잘린 부위를 이리저리 헤집는다.(모르지만, 얼마나 다쳤는지 보는 것 같다.) 덜렁덜렁대는 손가락 포를 뒤집을 때마다 나는 저게 뜯겨나갈까 봐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다. 그렇게 환부를 살피고는 스텐 바트에 소독 솜을 한가득 가져와서는 절단 부위 안쪽과 바깥쪽으로 솜을 굴려댄다. 거스러미가 난 것 마냥 이제 손가락에서 떨어져 있기로 결정한 것인지 자른 부위는 계속 덜렁댄다.
"아파요."
이 말과 동시에 선생님은 빨간약이 묻은 솜을 환부에 지그시 가져다 댔다. 상처에 닿는 빨간약이 얼마나 아픈지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았다. 잠깐 빨간 약을 묻히고 마는 줄 알았더니 5초 이상을 꾹 눌러댄다. 이럴 거면 "많이 아파요"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환부가 쿡쿡 쑤신다고 표현하기도 아깝다. 바늘 몇 개로 푹 찌르는 느낌이었다. 물론 나도 빨간약을 쓴 지가 하도 오래돼서 잊고 있었다. 그다음, 피가 안 통하게 손가락을 꽁꽁 묶는다. 고무줄이 아니라 니트로 장갑을 자른 것을 집게로 집어둔다. 의사가 들어와서 손가락을 또 보더니 피가 좀 통하는 것 같자, 이번엔 손가락 뼈가 아플 정도로 세게 묶는다. 만족한 것인지 다시 들어온 의사가 남은 피를 여러 번 거즈에 짜낸 뒤에 드디어 인체본드를 환부 위에 묻힌다.
(실로 꼬매기로 결정하면, 마취를 한다고 한다. 인체본드는 비급여로 응급실에서 4만 원 정도 한다. 나는 이럴 때를 위해 내가 돈을 버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통 대신 돈을 내기로 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게 베였으면 인체본드 옵션은 없다고 한다. 앞으로 손가락을 베일 예정이라면 조금만 베도록 하자.)
처치를 마치기 전까지 좀 무서웠다. 뭔 일이 날까 봐. 한밤중의 응급실에서 치료를 제때 받는 건 큰 운이기 때문이다. 큰 사고가 나거나 진상 환자라도 있으면, 나 같은 베임 사고는 취급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염려까지 계산해 마취를 하고 실로 환부를 꿰매는 대신 (시간도 오래 걸릴 테고, 상상만 해도 무섭다.) 인체본드를 선택한 나는 오늘 밤엔 (적어도 내가 치료를 다 받기 전까지는) 큰 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다행히 처치도 잘 되어 다시 기분이 살아나자 슬슬 배가 고파 남아있는 재료로 오리불고기를 계속할지, 냉동 음식을 데워 먹을지 따위를 토론하며 집에 왔다. 도마 위 핏자국 하나 없이 가지런히 썰려있는 양파를 보니 질리는 기분이었다. 칼을 본 순간 손이 잘리는 기분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