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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란도나츠 Aug 07. 2024

여기저기 돈 떼이는 호구 이야기

돈 달라는 건 궁상맞은 게 아니지만 좀 그래서요


내 사진은 아니고 AI 사진이다. Designed by Freepik (www.freepik.com)




어릴 적 친구들에게 천 원, 이천 원 빌려준 돈을 돌려달라는 말을 잘 못했다. 한 번 말하면 보통 주는데, 해봐도 바로 안 주는 경우엔, 다시 말하기가 힘들어 돈을 떼였다.



뿐만이 아니다. 내가 초등학생 때, 우리 어머니는 매주 월요일 용돈을 달라 하면 천 원의 용돈을 주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이 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월요일이 되면 득달같이 '용돈 달라'라고 하는 것 자체가 궁상맞은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번 월요일에 달라할지 말 지 고민하고, 화요일에 "엄마 어제 용돈 못 받았는데"라고 말했다. 늘 "어제 왔어야지"라며 퇴짜를 맞았다. 아마 스스로 소비계획을 세우고 써보는 경험을 만들어보자는 돈에 관한 교육방침이셨을 테지만, 실패했다. 떡볶이나 문제집, 공책을 사는 일 따위에는 늘 함께 가서 사주셨기 때문에 용돈을 따로 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컸기 때문이다. 중, 고등학교 때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에는 야자가 의무였기 때문에 더더욱 (떡볶이 먹을 돈을 제외하곤!) 필요가 없었다.  버스카드에 충전한 돈이 없을 때가 유일하게 돈 달라는 때였다. 



돈 쓸 일이 없던 탓에 원래 내가 제 밥그릇을 못 챙기는 사람이라는 게 대학생이 되어서야 드러났다.


타지에 살다 보니 기숙사비를 제외하고 한 달에 삼십만 원을 용돈으로 받게 되었는데, 보통은 아버지께서 한 달에 한 번 용돈을 계좌로 보내셨다. 그런데 한 번은 아버지께서 송금하는 걸 깜빡하셨다. 그런데도 말도 못 하고 계좌에 단 2,320원이 남아 3천5백 원짜리 학식을 못 먹게 될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돈이 없다'며 엄마께 전화를 드렸다. (그 바람에 아버지가 매우 혼이 나셨다.)


이렇게 소중하게 받는 용돈 삼십만 원. 한 번은 친구와 점심을 먹고 값을 내가 치르면 송금해 준다고 해서 돈을 냈다. 친구는 오천 오백 원짜리를 먹었고, 나는 사천 오백 원짜리를 먹었다. 나중에 친구는 백 원 단위는 떼서 주겠다며 5천 원만 줬다. 그깟 오백 원 달라하기 쪼잔시러운데다 말 꺼내기가 좀스러워 받지도 못했다. 그런 소인배가 되면 안 된다 싶으면서도 그 일은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각이 난다. 


용돈만 받지 말고 대학생이 되었으면 알바를 해서 벌었으면 되지 않느냐 싶을 테다. 하지만 족족 실패했다.


내가 대학생일 때에는 시급이 5천 원이던 시절이었다. 4시간 일하고 나면 2만 원 정도 손에 쥘 수 있었다. 차라리 노는 게 낫겠다 싶어서 처음엔 학교 바로 앞에서 할 수 있던 카페 알바를 포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알바를 했어야 했다.)


그러다가 목동의 한 학원에서 보조 알바를 구하길래 갔다. (그 당시 시급 8천 원이었다!) 면접을 덜컥 붙었다. 집도 멀고 해서 안 한다고 했더니(3시간이나 걸렸다.),  그 시간까지 더해서 주겠다고 했다. 안 할 이유가 없다 싶어서 승낙했다. 석 달간 여대생에게 추근대는 남자 강사의 치졸함을 견뎌야 했다. (밤에 술까지 먹고 가라고 했다!) 안 되겠다 싶어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 강사는 돈을 못 준다고 버텼다. 고용청을 가네 마네 하다가 절반도 안 되는 돈을 받았다. 그는 그만두는 게 괘씸하다며 주지 않겠다고 했다.


2012년도에 미국에 가게 됐는데 그게 결정되기 전 샌드위치 가게에서 오픈 알바를 했다. (사무보조 알바도 붙었는데 아버지께서 샌드위치 가게 같은 데서 알바를 해보는 게 더 좋다고 권했다! 속았다!) 6시 오픈이었는데 매번 5시 30분까지 나오지 않는다면서 업주는 불평을 했다. 그래서 매일 첫 차를 타고 출근했다. 돈을 더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업주는 출근을 하면서 재료 배달 온 걸 가져오라 했고, 퇴근하면서 배달까지 하라고 했다. 매일 30분에서 한 시간씩 더 일을 해줬다. 여기도 수습기간이 있었다. (수습기간이라고 하면 최저임금보다 덜 준다.) 미국에 가게 되면서 일을 그만뒀는데 다들 삼사 년은 하고 그만두는데 너는 반년도 안 돼 그만둔다며 한 소리를 들었다. 매일 더 일한 시간은 시급으로 쳐주지 않았다.


미국에서 잠깐 일할 때에도 억척스럽게 이런저런 알바를 구하는 언니 오빠들이 많았다.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 두 개정도 알바를 해보게 됐는데 결과는 영 좋지 못했다. 하나는 귀금속을 판매하는 일이었다. 수습기간이라며 아르바이트비를 좀 떼어서 줬고, 매출이 생각만큼 좋지 않다며 원래 주겠다던 인센티브도 안 줬다. 결국 관뒀다.  다른 하나는 레스토랑에서 카운터를 보는 일이었는데 (또!) 왕복 3시간 걸려 가야 하는 데다 오가는 기차비용이 만 원 정도 들었다. 한 달 만에 관뒀다. 업주는 돈을 계좌로 못 주겠다며 와서 받으라 했다. 오가는데 큰돈이었지만 거길 들렀다 집에 가면 10시가 넘는 때였다. 그래서 관뒀다. 일하면서 맛있는 음식을 공짜로 먹은 값으로 친다면서. (실제로 맛있기는 했다.)


기자가 된 이후 나는 아르바이트생이나, 계약직 근로자들이 돈 떼인 사연을 기사로 썼다. 최저임금 기사도 많이 썼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 얘기도 많이 썼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고용청에 신고해야 한다거나 녹취를 하라는 등 똑 부러진 조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이런 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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