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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e Feb 14. 2022

나의 이혼이야기.08

08.대학생활

 재수를 한 후에 난 내가 원하던 것. 2호선을 타는 것과 간판을 따는 것. 두 가지를 이루었다. 


 디자인이 꼭 하고 싶어 대학 진로를 정하는데 굉장한 어려움과 아버지와의 갈등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무조건 법대에 가길 원하셨다- 실내 디자인과는 내 생애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고집해서 이루어 낸 첫 번째 선택이었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서 접한 실내디자인은 내 생각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일단 난 가난한 학생이었고 실내 디자인과는 돈이 많이 들었다. 


 수업은 재미있었지만 과 아이들과 수업과의 거리감은 점점 느껴졌다. 난 강남에 이상한 두려움이 있었는데-돈 많고 뭔가 힙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란- 전공 교수님은 강남의 유명한 호텔들을 알려주시며 거기를 견학 다녀오라고 했다.


 그런 곳은 그 당시 한 잔에 음료수가 2만 원 가까이하는 비싼 곳이었는데 그 당시의 내게 최고의 사치는 편의점에서 사 먹는 2300원짜리 나뚜루 녹차 아이스크림이었다. 


 정말 우울한 날 -발표 후 교수님께 발린 날-에만 사 먹는 나와 내 친구와의 사치였다. (그 친구는 나랑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한 학년을 마치고는 국어교육과로 전과를 해서 지금 선생님이 되어 잘 살고 있다.)


 한 번은 전공 수업 때 모형을 만들었는데 그때 막 디지털카메라가 나온 시기였다. 전공 교수님은 접사가 가능한 디카를 알려주시며 그걸로 사진을 찍어오라고 하셨는데 니콘이라는 브랜드의 카메라였다.


 가격은 60만 원. 어머니께 사달라고 했지만 그동안 이것저것 재료비도 많이 들고 어머니는 그럴 돈이 어딨냐며 단칼에 자르셨다.


 눈물이 났다. 집안 사정을 이해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 과제는 어떻게 하나 싶어 서러워서 펑펑 울고 있는데 그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이러이러해서 카메라를 사야 하는데 돈이 없어 못 산다.라고 울며 겨우겨우 말을 했다.


 그 사람은 가만히 듣더니 "내가 사줄게."라고 했다. 그 사람도 정말 가난하고 과외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아는 나인데 덥석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절박했고 결국 그 사람에게서 카메라를 선물 받았다.


 그 순간 그는 정말 나에게 슈퍼히어로이자 어려움에서 날 구해준 은인이었다. 정말 고마웠고 남대문 시장에 가서 카메라를 사주는 그가 이렇게 빛나고 멋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 이 사람이야. 이 사람이 내 남자 친구야.' 


 아무튼 전공 수업이 재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과제가 힘들고 돈이 많이 들어서 그렇지. 하지만 전공 수업보다 내 눈앞에 펼쳐진 다양한 분야의 교양 수업이 날 더욱 사로잡았다. 반짝반짝한 모래가 빛나는 해변을 걸어 다니는 기분이랄까.


 대학 수업의 가장 좋은 점은 내가 듣고 싶은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철학수업에 빠져 철학 전공수업을 듣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시간이 남으면 무조건 서울대 공대에 갔다. 복학한 그 사람은 많이 힘들어했다. 일단 학점도 너무 안 좋은 상태였고 동기도 다들 졸업하고 없었고 수업은 수업대로 너무 어려워 어떻게 할지 모르는 상태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정말 '말하는 대로'가사처럼 내일 뭐하지 내일 뭐하지 걱정을 하며 잠을 못 자고 괴로워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우연스럽게 공대의 공용 탁구대에서 탁구를 치다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그 친구들로 인해 공부도 하고 우정도 다지며 어려운 시기를 기적처럼 이겨내게 되었다.


 우리의 데이트는 주로 서울대 공대에서 이루어졌는데 아마 그 당시 서울대 공대 학생들은 내가 같은 과 학생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만원. 만원이 우리의 하루 데이트 비용이었다. 2500짜리 김치볶음밥이나 학식을 먹고 '녹두'라는 동네에 가서 피시방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의 졸업이 다가올수록 학교 도서관이나 공대 도서관에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는 동안 결국 난 학과에 염증을 느껴 3학년을 마치고는 아버지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1년 휴학을 하고-이 또한 우리 집에서 엄청난 특권이었다- 이런저런 공모전에 도전을 했다.


 광고홍보학 쪽으로 취직을 하고 싶었는데 사실 그냥 쉬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필요할 때만 인사하는 과 친구들. 내가 필기를 잘한다는 걸 알면서 시험 때만 그들은 나에게 인사를 하고 노트를 복사해가곤 했다. 일명 난 아웃사이더였다. 


 아무튼 내 삶의 구멍들을 돌아보기보다는 그 구멍들이 커질수록 더욱 그 사람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하루라도 그 사람을 안 보면 눈에 가시가 돋는 병에 걸려 매일매일 안 보면 불안하고 속상하고 우울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만 나면 매일 서울대에 가서 살았고 내가 좋아하는 수업 위주로 들어서 학점은 좋았지만 인생의 뚜렷한 길이나 방향 따위는 설정되지 않은 상태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오죽하면 지역 방송국 면접 때 '자신이 꾸준히 한 일과 잘한 일에 대해 말해보라'는 질문에 고민하다가 '전 현 남자 친구를 7년째 만나고 있습니다. 그가 군대 갔을 때도 꾸준히 뒷바라지를 하며 기다렸고 제대 후에도 잘 만나고 있습니다.'라고 했을까.(더 놀란 건 그 면접에서 1차를 통과한 것이었다)


 그랬다. 그를 오랜 시간 만나고 서로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도 함께한 7년이란 시간은 나에게 의미 있고 가장 가치 있는 자랑거리였다. 그리고 연애 8년 차.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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