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색 새싹이 움트고 꽃이 피어나는 4월이면 마음이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다. 어디든 떠나야 한다. 3월의 마지막 오후, 여수로 출발했다. 밤 11시, 차갑고 조용한 여수 밤바다를 보며 우리를 제주로 데려갈 배를 기다렸다. 여수항에 차들이 줄지어 서고 밤의 정적을 깨우듯 엄청나게 큰 배가 들어왔다. 잠자던 항구가 소란스러워지며 배에서 끊임없이 물류 트럭과 차들이 나오고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내렸다. 이름도 위풍당당한 'Gold Stella'에 우리 차를 실었다. 남편과 나는 예약한 'Pet Room-6303'에 들어가 널찍한 방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맞은편에 남자와 여자가 우리를 향해 짖어대는 치와와를 달랬다. 이번 여행은 남편과 나 그리고 우리 강아지 은동이와의 여행이었으나 은동이는 함께하지 못했다. 젊은 남자가 강아지 케이지를 들고 들어와 이불을 깔고 작고 귀여운 강아지를 꺼냈고 강아지는 나와 눈을 맞추며 인사를 했다. 집에 두고 온 은동이를 생각하는 순간 그 녀석이 내 옆에서 아주 시원하게 오줌을 싸고 훌륭한 일을 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젊은 남자가 휴지를 꺼내고 이불을 들추고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나는 Pet Room-6303을 나왔다. 바다 바람이 시원하다. 어둠 저편에 제주가 있다. 제주로 간다.
(여수항의 모습) ( Gold Stella 호)
(4월 1일 일출)
Pet room-6303으로 돌아가지 않고 2층 복도 긴 의자에 잠깐 누웠는데 5시간이 지났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오니 제주의 첫날 해가 뜬다. 분홍빛 해가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바람이 차다.
제주항 건너 보이는 사라봉에 하얀 벚꽃이 피었다. 봄이다.
한달살이를 준비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숙소의 선택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바다로 나가 걸을 수 있는 조용한 마을, 펜션보다는 작은 돌담집, 19kg 진돗개 동반 가능한 숙소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운이 좋았는지 딸이 에어비앤비에서 보석 같은 작은 집을 찾았다. 하도리 별방진 성곽 아래 작은 마을 돌담집으로 들어서자 마음 좋은 주인아저씨가 우리를 반겼다. 강한 바다바람 때문에 인기 없던 마을인데 이제 사람들이 찾는 마을이 되었다고 하며 웃었다. 유채꽃이 핀 작은 마당을 보니 집에 있는 우리 막내 은동이가 너무 아쉬웠다.
(바람의 마을, 하도리) ( 별방 1974 )
숙소에 짐을 풀고 바다로 나왔다. 이름도 예쁜 세화리까지 숨비소리길을 걷는다. 푸른 바다와 노란 유채꽃 사이로 보라색 흰색 무꽃이 살며시 인사를 한다. 세찬 바람이 달려온다.
겨울부터 준비한 제주 한달살이를 앞두고 엄마가 갑자기 수술을 했다. 출발 1주일 전, 대학병원에서 어깨 수술을 하시고 나는 병실에 함께 있었다. 출발 하루 전, 퇴원을 하고 집 근처 한방재활병원에 다시 엄마를 입원시켰다. 출발 당일 엄마를 보고 영양주사 처방을 받도록 하고 집에 돌아와 차에 짐을 싣고 떠나는 순간까지 한달살이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엄마를 차에 태우고 퇴원하던 날, 강북강변에 노란 개나리가 벌써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좋은 계절, 병원에서 지내야 하는 엄마가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다. 돌이켜보면, 4월에 나는 가방을 챙기고 어디든 떠났고 한 번도 마음 편했던 기억이 없다. 떠날 이유가 있지만 떠나지 못 할 이유는 더 많다. 그래도 떠났다. 그리고 돌아왔다.
오후에 녹산로를 달렸다. 유채꽃과 벚꽃, 그리고 꽃만큼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오늘을 남기느라 수선스러웠다. 지난주, 엄마와 같은 병실, 엄마 침대 옆, 젊은 아가씨가 다리 수술을 하고 누워있었다. 2년째 병원에서 지낸다는 털모자를 쓰고 누워있는 이름도 예쁜 아가씨가 너무 안쓰러웠다. 퇴원하는 날, 초콜릿을 사서 손에 쥐어주고 이제 아프지 말라고 말했더니 '네!' 라고 대답하며 웃는 모습이 예뻤다. 녹산로의 하얀 벚꽃을 보니 그 아가씨가 떠올랐다. 내년 봄에는 이 소란스러운 곳에서 벚꽃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아가씨도 우리 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