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숨비소리길을 걷는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하늘이지 알 수 없다. 삼일째 아침, 세화리를 향해 같은 길을 걷지만 가끔 나를 스쳐가는 사람도 길의 향기도 바다의 색도 다르다. 오늘은 세화 바다에서 마을로 들어가 세화 성당으로 간다. 초등학교를 지나고 아직도 동백꽃이 무성히 열려있는 멋진 집을 지나고 마을 게이트볼장을 지나 큰길을 건너 세화고등학교 건너 안쪽으로 작은 성당이 숨어있다. 미사가 시작되었다.
맨 뒷자리에 앉아 미사를 보고 미사가 끝나자 제일 처음으로 문을 나섰다. 신부님의 눈이 커졌다. 이내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했다. 20명이 조금 넘을까! 모두 가족 같은 느낌이다.
미숫가루와 삶은 계란으로 아침을 먹고 에너지바를 가방에 챙기고 길을 달려 올레길 1코스 안내센터에 도착했다. 말미오름으로 오르는 계단에 노란 미나리아재비 꽃과 보라색 제비꽃이 피었다. 민들레도 보인다. 헉헉거리며 계단을 오르니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한눈에 보이는 정상이다. 말미오름에서 알오름으로 가는 길에 남편과 나는 11년 전, 2011년 6월 당시 1살이던 강아지 백호와 함께 찍은 사진의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날, 장흥에서 제주로 도착, 이곳 말미오름에서 백호와 남편이 내려가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었다. 남편이 나를 돌아보는 순간 노루 한 마리가 어디선가 바람처럼 달려왔고 강아지 백호가 놀라 뛰었다. 그날 그 자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1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노루와 함께 뛰었던 한 살배기 백호는 2020년 여름, 열 살의 나이로 내 품에서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유난스럽게 예뻐한다는 엄마의 말씀처럼 다시는 유난스러운 사랑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백호가 하늘로 떠나고 3개월 후 11월 스산한 가을날, 남편과 산책길에서 시에서 주관하는 유기견 분양홍보를 보았다. '내일이면 안락사합니다'라는 무서운 플래카드 아래 케이지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는 새끼 강아지를 남편이 덥석 안았다. 곰 새끼같이 동글동글한 하얀 강아지에게 남편은 '은동(銀童)'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다시 그 유난스러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2011년 6월 13일 2022년 4월 3일
말미오름과 알오름을 걷고 제주에서도 만날 수 있다는 '블루보틀'로 향했다. 대기 27번, 30분의 기다림 끝에 카페에 들어서자 배고픈 우리에게 커피 말고 다른 선택은 없었다. 커피를 사들고 다시 평대리 샌드위치 가게로 향했다. 이름도 예쁜 가게 '그초록!', 바다를 마주하고 커다란 샌드위치를 입에 물었다. 세련되고 멋진 그러나 녹산로의 벚꽃길만큼 북적이는 블루보틀보다 이곳이 마음도 맛도 편했다. 열심히 풍성한 샌드위치를 만드는 주인 커플이 예뻤다.
늦은 점심을 먹으니 다시 힘이 났다. 제주대학교 벚꽃길로 달렸다. 벚꽃을 좋아하는 부인을 모시는 남편은 이맘때면 운전하느라 힘들다고 말한다. 제주대학교 입구부터 벚꽃 차량으로 길이 막혔다. 하얀 꽃잎이 하늘 가득하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고구마와 감자를 사고 집에 돌아와 창고에 있는 나무로 작은 화로에 불을 붙였다. 하늘은 짙은 푸름에서 검은 어둠으로 변한다. 작은 집, 작은 뜰, 작은 화로에 불을 붙이고 나무가 타악 타악 소리를 내었다. 바람은 차고 화로의 불은 따뜻하고 하늘에 별이 빛난다. 이제는 별이 되었을까! 11년 전, 한 살배기 백호와 함께 걸었던 그 길이 언제나 그곳에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