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다. 숨비소리길을 걷는다.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행복하다. 제주에 올 때마다 마음이 바빴다. 길어야 4박 5일의 일정을 쪼개어 서쪽에서 이틀 동쪽에서 이틀 혹은 남쪽으로! 걷고 싶은 길도,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제주여행은 언제나 바빴다. 올레길을 걷고 오름에 오르고 미술관에 들르고 해도 마음이 부족했다. 이렇게 매일, 같은 길을 걷는 일상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오늘도 세화리를 향해 천천히 걷는다. 매일 걸으며 매일 다른 모습을 본다. 어제와 다른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고 향기를 맡는다.
(하도리에서 세화리로 걷는 숨비소리길)
바닷길 카페, 제주 무 다발과 무처럼 동글동글한 고양이 한 마리가 가게를 지킨다. 아주머니가 고양이 밥그릇을 가지고 걸어온다. '우리 아들이 이 카페 사장인데 어느 날 와 보니 이 고양이에게 5만 원짜리 사료를 주더라고'. 아주머니가 볼맨 소리를 한다. 아주머니는 아들에게 네가 나에게 5만 원을 쓴 적이 있냐고 야단을 쳤지만 어쩔 수 없이 고양이를 들이고 중성화 수술도 시켜주었다고 한다. 밥그릇에 얼핏 고기가 가득하다.
카페 SOKSOM
월요일 아침 세화 바닷가는 어제보다 한산하다. 아침을 먹지 않고 걸었더니 배가 고프고 갑자기 시골 방앗간에서 맛보는 떡이 먹고 싶다. 바닷가에서 마을로 들어서 떡집을 찾았다. 세화초등학교를 지나고 경찰서를 지나고 버스가 다니는 큰길로 들어서며 방앗간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서니 바쁘게 일하는 아저씨가 소매로 팔지는 않는단다. 참기름 냄새만 맡고 돌아서려는데 밖으로 나와 길 위를 가리키며 저쪽으로 가면 살 수 있는 떡집이 있다고 가르쳐준다. 그 저쪽을 향해 걸어도 찾을 수는 없고 지난가을에 삐끗한 발목이 시큰거렸다. 버스정류장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하도리로 별방진으로 가는 버스가 있나요! 하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퉁명스럽게 하도리로는 가지만 별방진으로 가는 버스는 이미 지났다고 한다. 하도리에서 내려 걸으면 된다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과 버스를 탔다. 버스는 바닷길이 아닌 큰길로 하도리를 향했다. 하도리 면수동이라는 방송에 내리려는 나에게 뒤에서 할아버지의 '여기는 아니고 다음'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 다음, 하도리 서문동에서 다시 내리려니 이번에는 할머니들과 할아버지의 합창이 들렸다. '여기 아니고 다음이라니까'. 그리고 다음 하도리 초등학교에서 내렸다. 뒤를 돌아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어서 내리라고 손짓을 한다.
표선에서 점심을 먹고 민속촌에 주차를 하고 자전거로 '제주 환상 자전거길, 표선 해비치 해변'을 달렸다. 36.77km 2시간 20분! 이틀 전 동쪽 자전거길을 달릴 때보다는 몸이 편했다. 익숙해진 듯했다.
이틀전 하도리 - 성산일출봉의 제주 동쪽 길과는 조금 다르다. 해비치에서 시작할 때는 거칠 것 없는 바닷길이지만 남원으로 갈수록 공장도 보이고 마을로 들어가기도 한다. 소노캄 제주를 지나며 다시 바닷길로 들어가고 남원까지 유채꽃과 무꽃의 하늘거리는 바다를 달렸다.
8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자전거로 순례길을 달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다음에 자전거 순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순례길 숙소에서 자전거로 순례길을 달리는 독일인 엄마와 딸을 만났다. 언제나 미소 가득한 딸이 기특했다. 하루에 얼마나 달리는가 물어보았더니 60 - 70km 달린다고 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산티아고를 자전거로 달리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그러나 바쁜 일상의 일들로 언제나 희망사항이었다. 오늘 36.77km를 달리고 집에 돌아오니 허리도 무릎도 발목도 아팠다. 체력을 키우면 다시 산티아고 성당을 향해 이번에는 자전거로 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꿈이라도 좋다.
'섬사람은 똑똑하고 생활력 강하고 그리고 깍쟁이란다.'라고 누군가 말했었다. 제주에 올 때마다 마음이 급했다. 제주 사람들도 이곳 섬도 너무 무심해 보였다. 그러나 오늘 내게 다가온 제주는 마음을 내어주었다. 무심하게 조금씩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