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 원룸 침대가 말썽을 부렸다. 첫날 숙소에 도착해보니 정말 작은 방에 침대 하나와 세면대 겸 싱크대 하나 그리고 방안에 샤워부스가 있었다. 화장실은 원룸에서 나가서 층마다 하나 있는 공용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방이 너무 좁아 짐을 둘 곳도 없어 파리에 머무는 동안 항상 캐리어를 세워 두어야 했다. 숙소는 딸이 예약했고 airbnb 화면에서는 그럴 듯 한 원룸이었다. 사진보다 너무 작은 방을 보고 당황했지만, 딸에게 방에 머무는 시간은 별로 없을 거라고 괜찮다고 했는데 침대가 이상해서 확인해보니 그나마 하나 있는 침대의 매트리스 아래 나무 지지대가 부러져 있었다. 첫날, 숙소의 주인은 본인이 운영하는 크레페 식당을 마감하고 밤늦게 와서 부러진 지지대 나무를 검은 테이프로 칭칭 감는 말도 안 되는 처방을 하고, 문제가 있으면 연락하라고 하고는 웃었는데 결국 어젯밤에 다시부러졌다. 주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와보겠다고는 하지만 물론 식당영업을 끝내고 난 후에. 오늘 밤도 부러진 침대에서 자야 하는지. 어쨌든 밤새 잠을 설치고 최악의 컨디션이다. 그래도 오늘은 모네의 지베르니에 가야 한다. 숙소에 정이 떨어져 머물고 싶지도 않았지만 딸과 나는 여행을 떠나면 아침 7시부터 저녁 10시까지 돌아다녀야 하루의 끝이 난다.
숙소에서 지베르니까지는 지하철과 기차로 2시간 30분 걸린다. N16을 타고 생 라자르 기차역으로 가서 기차로 갈아타고 Vernon에 내려 다시 버스나 꼬마열차를 타고 지베르니에 간다. 생 라자르 기차역은 모네의 그림에 나오는 기차역이다.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그 그림에서 모네는 삼각형의 큰 지붕 아래 증기기관차가 뿜어내는 수증기와 기차역의 옛 모습을 그려냈다. 어린 시절 추억의 한 조각처럼, 어딘가에 두고 온 그리움처럼 아득한 그 기차역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출발하기 위해 숙소 근처 카페로 갔다.
'Matamata Coffee'
오트밀 카푸치노와 크로와상, 당근 케이크, 그리고 아보카도 토스트!
바삭한 빵과 꿀, 아보카도와 치즈의 조합이라니!
귀여운 작은 카페, 친절한 직원, 맛있는 아침.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모네의 정원을 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준비물은 날씨이다. 꽃과 수련을 보기 위해 햇살이 비추는 맑은 날씨가 가장 중요한데 오늘의 날씨는 부슬비가 내리는 바람 부는 짓궂고 심술 맞은 전형적인 파리의 날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보카도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걱정이 사라지고 웃음이 나왔다. 지베르니에 도착하면 햇살이 마중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처음 맛본 오트밀 카푸치노의 진한 카페인 때문인지 달콤하고 결이 살아있는 크로와상 때문인지, 자리가 없어서 앉은 문 앞 작은 테이블의 아침식사가 최고의 아침을 만들어주었다.
아보카도 토스트 당근 케이크
생 라자르 역은 물론 모네의 그림을 떠올리기에는 너무 다른 현대의 기차역이었지만, 어디서든 증기기관차의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다. Vernon까지 기차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아름다웠고 Vernon에서 바람이 부는 날씨에도 버스보다는 꼬마기차를 탔다. 시골 마을을 지나 지베르니로 가는 길에 기적처럼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나타났다. 커피 때문일까 간절한 마음 때문일까 모네의 마지막을 함께한 그곳을 모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빛과 함께 보고 싶었다. 모네의 정원에서 햇살에 빛나는 수련을 보았다.
(모네의 집 )
(모네의 아뜰리에)
지베르니(Giverny), 모네의 정원
(모네의 무덤, 꽃과 함께 잠든 모네)
지베르니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들의 선물도 살 겸 샹젤리제 거리로 갔다.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 유니폼을 사러 돌아다니다 결국 원하는 모양을 사지 못하고 모든 에너지가 방전되었을 때 숙소 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침대를 샀으나 오늘은 배송이 안되었다고 내일이나 모레쯤 이라고 미안하다고 말하며 자기가 운영하는 크레페 가게가 10시 30분에 문을 닫으니 그리로 오면 최고의 크레페를 맛보게 해주겠다고 했다.
너무 피곤해서 숙소로 바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저녁도 먹어야 하고 내일이나 모레쯤이라면 우리는 니스로 가야 하는데 결국 부러진 침대에서 쪽잠을 자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일단 최고의 크레페 맛이 궁금해 집주인의 가게로 갔다. 숙소 근처 작은 크레페 전문 가게였는데 들어가니 숙소 주인과 친구들이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달콤한 캐러멜 크레페와 얇은 크레페 반죽에 크림소스와 연어, 시금치가 들어간 크레페는 이름은 모르지만 지베르니로 가는 길, 하늘 위 뭉게구름 맛이라고 할까.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집주인이 부러진 침대의 미안함을 대신하고 싶다고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기분 좋게 bye를 하고 돌아왔다. 부러진 침대의 쪽잠은 계속되었지만 작은 크레페 가게의 젊고 유쾌했던 친구들, 그리고 따뜻한 크레페 한 조각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에필로그
피곤해서 그리고 가게 마감시간을 지날까 서둘러 먹느라 가게와 크레페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이 글을 쓰면서 지도에서 숙소 근처 크레페 가게를 찾았지만 생각보다 크레페 전문점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사진을 보니
'La Crepe En L'isle' 이 아닌가 싶다. 어두운 밤이었고 확실하지는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