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은 언제나 옳다. 내가 힘들여 지도를 보고 운전하지 않아도, 차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나무, 구름, 삐뚤삐뚤한 집, 때때로 사람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된다. 바라보다가 지나간 시간을 생각한다. 눈을 슬쩍 감고 떠올리는 지나간 시간은 가슴 시린 혹독한 기억일지라도 기차가 소환해주는 추억은 달고 애틋하고 보고 싶은 시간이 된다.
3시 7분 TGV 기차를 타고 니스로 간다. 저녁 9시 7분 도착이다. 니스로 떠나기 전, 루브르에 가던 날 먹었던 최고의 바게트를 다시 맛보기 위해 아침부터 서둘러 빵집 'Boulangerie Guilloton'로 향했다. 빵집 근처에 판테온 (PANTHEON)과 Saint-Etienne-Du-Mont 성당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종이 땡땡 울리고 마법의 택시가 주인공을 과거로 데려간 성당 앞 계단)도 보려고 한다. N14를 타고 걷고 빵집에 도착해
치즈 & 살라미 바게트 샌드위치, 애플파이, 뺑 오 쇼콜라를 포장해서 나왔다. 구수하고 달콤한 냄새가 유혹했지만 니스로 가는 6시간 기차여행 중 먹을 귀중한 식량이다. 빵집에서 나와 걸어가는데 미술과 고고학 연구원 (Institut d'Art et d'Archeologie) 건물이 눈에 띄었다. Art & Technology를 전공하는 딸에게 ' 이런 곳에서 앞으로 더 공부하면 좋겠다' 고 말했다. 사실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마차를 탈 수 있다면, 내가 저 멋진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가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미술과 고고학 연구원 (Institut d'Art et d'Archeologie)
뤽상부르 공원을 통과해 판테온이 보이는 'Rye des Carnes' 거리에 늘어선 야외 카페에서 비싼 커피와 크로와상을 먹고 (맛은 가격에 비해 기대 이하였지만, 거리의 뷰가 기대 이상 인) 판테온에 입장하려 하는데 생각보다 대기하는 줄이 길었다. 시간은 11시를 넘어서고 아무래도 숙소로 돌아가 짐을 가지고 파리 리옹역으로 가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긴 대기 줄에 서 있다가 다시 나와 바로 옆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배경 Saint-Etienne-Du-Mont 성당 계단에 잠깐 앉아보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온 시간 12시를 넘기고 파리 리옹역까지는 지하철로 40분 정도 충분할 듯했으나 언제나 여행에는 기대하지 못했던 돌발상황이 있다.
돌발상황 1) 딸과 나는 파리에 입성할 때 1주일 지하철 패스를 끊었는데 전날 패스 유효기간이 끝나고 새로 지하철 티켓을 사야 했다. 캐리어를 끌고 집 앞 지하철 역에 가니 역무원은 없고 지하철 패스 무인판매기가 있는데 수리 중이었다. 지나는 사람들은 지갑을 대고 통과하는데 딸과 나는 캐리어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티켓을 사러 돌아다니다 결국 다시 밖으로 나왔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이 걸어서 15분 거리. 걸어야 하는가버스를 타야 하는가 택시를 불러야 하는가 시간은 점점 지나가고 우왕좌왕하다가 1시를 넘겼다. 버스나 택시는 길이 막힐 수도 있고 해서 다시 15분을 걸어 다른 지하철역에 들어가 일일 티켓을 사고 지하철을 탔다.
돌발상황 2) Gare de 'Est에서 리옹역으로 가는 N01 지하철을 갈아타는데 길을 잃었다. 짐을 끌고 혼란스러운 우리 앞에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티켓 검사를 하자 했다. 티켓을 보여주고 리옹역으로 갈아타는 길을 물었더니 밖으로 나가서 돌아가라고 했다. 구글 지도와는 반대로 가르쳐주는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그래도 경찰인데... 하고 가르쳐 준 길로 갔더니 역시 길이 아니었다. 다시 지하철 입구를 찾고 리옹역으로 가는 입구에 들어서 안도의 한숨일 내쉬는데 티켓 검사를 하고 골탕을 먹이려고 했는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길을 잘못 가르쳐준 경찰이 바로 옆에서 우리를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캐리어를 들고 뛰느라 힘이 빠진 손으로라도 복수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돌발상황 3) 땀을 흘리며 파리 리옹역에 도착하니 2시가 되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예약한 유레일패스의 사용일을 기입하기 위해 유레일 패스 창구에 갔다. 딸이 생수를 사 오고 겨우 물을 마시며 창구에 갔는데 역시 파리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긴 줄이 앞을 막아섰다. 우리가 예약한 패스는 꼭 사용 일자를 기입해야 한다. 날짜를 기입하지 않으면 '부정승차'가 된다. 째깍째깍 기차역의 시계는 3시를 향해 전 속력으로 달려가고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창구 직원에게 기차 시간이 다 되었다고 부탁을 했으나 역시나 'I don't care'였다. 마음이 쫄아들고 만약 기차를 놓친다면 하는 플랜 B를 딸과 의논했다. 창구는 거의 비워있고 착한 여행객들은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2시 45분! 기차를 포기하려는 순간 점심을 드신 창구 직원들이 돌아오셨는지 갑자기 줄이 줄어들고 우리의 차례가 되었다. 나는 그저 직원에게 3시 9분 니스행 기차를 외쳤다. 도장을 찍고 딸과 창구에서 기차 플랫폼까지 얼마나 뛰었는지.
기차를 겨우 타고 출발하는 기차에서 짐을 끌고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웃음이 나왔다. 딸과 한참 웃었다.
파리를 벗어나 정신을 차리니 뱃속에서 아우성 소리가 들렸다. 기차 식당에서 커피를 사 오고 우리의 소중한 치즈 살라미 바게트 샌드위치와 애플파이, 뺑 오 쇼콜라를 정신없이 감사히 먹었다.
아비뇽- 액상프로방스- 칸- 앙티브를 지나 니스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를 지났다. 멋진 니스 역을 통과해 밖으로 나오니 기대와는 다른 모습이다. 어두운 길가에 호텔이 줄지어 서 있다. 역에서 15분 거리의 호텔을 찾아 걸어가는 길에 다행히 슈퍼마켓이 있었다. 딸기와 Tyrrells 과자, 맥주를 샀다. 오늘의 늦은 저녁이다. 파리의 원룸에서 벗어나 싱글 침대 두 개의 방에 너무나도 만족했다. 원룸, 부러진 침대의 쪽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환호성을 질렀다. 싸구려 호텔 방이 7성급 호텔만큼 만족스러웠다. 달콤한 딸기와 소금과 후추향이 가득한 감자칩이 맥주에 녹아들었다. 프랑스 최고의 휴양지 니스의 첫 번째 식사였다. 나쁘지 않았다. 충분했다.
에필로그 :
크레페 가게에서 일하다 뛰어온 부러진 침대의 주인 ( 30대 후반쯤, 밝고 잘 웃는 건장한 청년, 집주인) 에게 니스로 떠나며 집 열쇠를 건네자 주인 청년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50 유로달러 몇 장을 내게 내밀었다. 부러진 침대와 열악한 집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라고 받아달라 했다. 갑자기 열심히 일하는 아들아이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웃으며 안 받겠다고 했다. 잘 지냈다고 (사실 부러진 침대가 점점 내려가 불면의 밤을 지냈지만) 지난밤, 늦은 시간,가게에서 먹었던 크레페가 정말 맛있었다고 고맙다고 했다. 주인 청년이 쭈뼛쭈뼛 지폐를 지갑에 넣으며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고 말했다. 1년 안에 다시 프랑스에 온다면, 언제든 1달 전에만 연락을 주면 무료로 일주일 방을 내어주겠다고 말했다.
진심이 느껴졌다. 마음과 마음이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그해 가을에 열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특별전 소식을 들었을 때 부러진 침대와 잘 웃던 청년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