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미술관도 많은데 하코네의 일정을 선택한 이유는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빨간 꼬마기차가 파랑, 보라색의 수국 꽃길을 달린다. 하코네의 기찻길 사진이다. 사실 나는 꽃을 좋아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고 꽃에 관한 지식도 없다. 언젠가 수국을 좋아하는 나의 친구에게 "국대접을 엎어놓은 모양의 꽃을 왜 좋아하는가"라고 물었다. 무식하고 용감하며 수국 꽃이 귀가 있다면 강으로 뛰어내릴 망언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보라색 파란색의 수국이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쯤 빨간 기차와 수국 길의 사진을 보았다.
새벽에 신주쿠 호텔에서 나와 7시 27분 신주쿠 출발 -9시 01분 하코네 유모토 도착하는 로만스키 기차를 탔다. 좌석은 1호차 1A와 3D. 로만스키 기차는 1호차 맨 앞 좌석에서 통유리로 시골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로만스키 기차)
기차에서 에키벤으로 돈가스 샌드위치를 먹고 1시간 34분 시골길을 달려 하코네 유모토에 도착한다. 로만스키 기차에서 여행자들이 내린다. 유모토역 3번 홈에서 하코네의 등산열차로 갈아탄다. 내가 사진에서 본 빨강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
작은 6량 기차는 후지 하코네 이즈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철 지난 수국이 드문드문 예쁜 모습을 드러낸다. 기차 안에 들뜬 표정의 사람들은 여행을 온 사람들이고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은 주민인 듯하다. 등산열차는 천천히 지그재그로 움직인다. 초록이 눈에 시리다. 터널을 통과한다. 잠깐 어둠에서 터널 끝에 보이는 초록은 내가 그동안 보아왔던 초록이 아니다. 환상의 빛이다.
(등산열차 안에서)
(터널 / 고라 역의 기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데뷔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에도 터널 끝의 초록을 표현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여자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음과 삶의 교차점에 보이는 초록과 바다의 풍경이 인상적이다. 오늘 나도 작은 기차가 보여주는 환상의 빛을 본다.
기차가 고라(Gora) 역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모두 내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다른 등산열차를 타고 소운잔 역으로 가서 케이블카를 타고 오와쿠다니 화산을 둘러본다. 마을 주민인 듯 보이는 아주머니들과 딸과 나는 고라 역에서 나왔다. 작은 역이다. 구글 지도를 켜고 오늘 밤을 지낼 온센호텔'Onsen Hotel Gorakan'을 찾았다. 깔끔한 입구에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나온다. 아주머니는 영어를 하지 못하고 나의 부족한 일본어와 수화로 겨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은 6시 가이세키 정식, 가족 노천탕은 7시로 예약하고 안내해주시는 방으로 들어간다. 깔끔한 다다미 방이다. 나무와 꽃이 내려다보이는 2층 방이다.
( Onsen Hotel Gorakan)
짐을 두고 얼른 나와 고라 역 앞에서 2번 버스를 탄다. 버스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고 폴라 미술관 'POLA MUSEUM OF ART'에 내렸다. 하코네의 보석 같은 미술관이다.
폴라 미술관(POLA MUSEUM OF ART) / 15주년 특별전 피카소와 샤갈 전시 / 전시포스터
( 미술관 입구 조각작품 Blessed Dogs by NIU )
나오시마의 지중미술관처럼 지상부의 높이를 최소화하고 지하에 설계한 미술관, 하코네 국립공원을 훼손하지 않고 숲과 조화를 이루어내는 아름다운 미술관이다. 미술관 입구에 행복한 두 마리의 강아지들이 우리를 맞아준다. 작가는 오키나와에서 입양된 개를 떠올린 듯, "더 많은 동물들이 마음도 몸도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개들도 고양이들도 야생의 동물들도 그리고 우리 인간들 역시...."라고 말한다.
화장품 회사로 유명한 폴라 그룹에서 2002년 개관한 미술관은 개관 15주년 기념으로 피카소와 샤갈의 특별전시를 하고 있다. 인상파 화가의 작품을 많이 소장한 미술관의 특별전시까지 보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피카소의 청색시대의 귀한 그림과 샤갈의 아름다운 작품을 볼 수 있다.
고흐 / 세잔 /모네
피카소 'Mother and Child by the Sea' / 샤갈 'I and the Village'
미술관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멋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미술관이 문을 닫는 5시까지 그림을 본다. 9,500 점의 작품을 소장한 폴라미술관의 상설전시는 놀랍다. 상설전시를 보고 다시 특별전을 보고 잠깐 밖으로 나와 미술관 정원에서 Blessed Dogs 작가의 또 다른 소소한 조각 작품을 보고 하코네 국립공원의 숲을 걷는다.
(폴라 미술관 야외 산책로 / 조각 작품과 숲)
미술관에서 나와 다시 2번 버스를 타고 고라역 작은 마을로 돌아왔다. 온천장 여주인과 여동생인 듯, 닮은 두 여인이 차려주시는 정성 가득한 저녁을 먹고 담 너머로 산 자락이 보이는 온천을 하고 산 동네 공기만큼 산뜻한 이불에 들어가 잠이 든다. 샤갈의 그림 속 주인공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른다. 환상의 빛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