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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Nov 07. 2024

당신으로부터 온 말, ‘너는 말이야’

‘나'라는 말(심보선)

[2024 시 쓰는 가을] 여덟 번째 시


‘나'라는 말(심보선)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선 너머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 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주워 주위에 빙 둘러 놓았습니다.
물론 하루도 채 안 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혹은 어느 무심한 발길에 의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나는 내가 낳아본 적도 없는 아기처럼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평선이나 고향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너는 말이야‘ ‘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출처: <눈 앞에 없는 사람>


근래 들어 스스로가 하찮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그래도 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믿어왔는데 최근에는 마음이 좀 그랬습니다. 올해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육아 휴직을 하게 되었는데요. 아이가 더 어릴 때 했던 육아휴직은 ‘육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지금의 육아휴직은 ‘살림’에 조금 더 에너지를 쏟게 됩니다. 아무래도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고,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이전의 육아 휴직에 비해 많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엄마들끼리 모이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게 없는데 벌써 아이가 올 시간이 되었다”라고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저는 아이가 등교한 후 혼자 집에 있는 대여섯 시간 동안 한두 시간 정도를 제외하고는 엉덩이 붙일 틈 없이 집안일을 하거든요. 한 게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일을 너무도 익숙하게 해내다 보니 무엇을 한다는 감각 자체가 사라진 느낌이에요.


전쟁 같은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아이들이 썰물처럼 집을 빠져나가고 나면 개수대에 가득 쌓인 그릇을 씻어두고 세탁실 앞에 벗어둔 옷가지들을 정리합니다. 어제 해둔 빨래를 개어서 저마다의 자리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려요. 물걸레 청소기까지 돌리고 나면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습니다. 4인 가족이 사는 집에 쓰레기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요. 쓰레기 정리도 하고 며칠에 한 번씩은 화장실 청소, 냉장고 정리도 합니다. 한 시간 정도 아침 운동을 다녀오는 길에 두 손 가득 장을 봐와요. 어찌 장은 매일 봐도 매일 먹을 게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장을 봐온다고 그게 바로 요리가 되지는 않지요. 각종 채소류를 손질해서 밀폐용기에 담아두고 저녁 식사를 고민합니다. 그 사이 제 점심은 대충 때우는 한 끼가 되기 십상이에요. 겨우 엉덩이 붙이고 앉아 커피 한 잔 마시고 나면 곧 아이가 올 시간입니다.


아이가 오고 나면 더 분주한 일과가 기다립니다. 간식을 준비하고 아이를 맞이해요. 두 아이가 축구 학원, 미술 학원에 간 사이에 짬을 내어 러닝머신을 뛰고, 곧장 집으로 돌아와 저녁 준비, 하원한 아이들 마중, 아이들이 벗어낸 옷가지 정리 및 빨래를 합니다. 집안을 정리하고 아이들의 숙제나 공부를 봐주고 잠자리 독서를 하고 나면 하루가 끝나요.


이 매일이 대체로 감사하지만, 가끔은 못 견디게 구차할 때가 있어요. 누구한테 알아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지만, 정말 ‘이 집에서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그런 생각이 훅 끼칠 때면 말할 수 없이 슬퍼집니다. 내가 없으면 집이 안 돌아갈 것 같은데, 아무도 나의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생각. 스스로도 ’하는 일이 없다 ‘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깨달음.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스칠 때면 굉장히 허무해져요. 내가 하는 일이 하찮게 느껴지면서 ’나‘란 존재 자체까지 하찮은 느낌이 들 때면, 어떻게 이 생각에서 벗어나야 할지 길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오늘의 시 <’나‘라는 말>(심보선)은 제가 요즘 가장 자주 읽고 품는 시입니다. ‘나’란 존재가 미워지기도 하고 옅어지기도 하는 때에 가장 따뜻한 처방전 같은 시예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는 화자가 산책길에서 발견한 ’나‘라는 글자를 보호해 주는 행위는 아름답습니다. 타인의 고독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대하는 마음이 따사로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 음각일 때가 더 좋다‘는 표현은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다’라는 표현과 같은 결로 읽힙니다. 드러나는 것보다 가라앉아 있을 때의 ‘나’를 더 아끼는 마음은 그 대상이 ‘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세상 누구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순간, 바닥에 음각으로 새겨진 ‘나’를 알아보는 유일한 사람은 나 자신뿐일 테니까요.


하지만 화자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당신의 온몸을 한바퀴 돈 후/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나‘라는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당신이 ‘너’로 명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떠오르네요.) 이 세상에 내가 혼자 남는다면, ’나‘라는 존재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지도 몰라요. ’나‘와 ’너‘는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나’가 없이는 ‘너’도 없듯이, ’너‘가 없다면 ’나’도 존재하기 어렵지요.


제가 얼마간 스스로를 하찮다 여겼던 데에는 저에게 ’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어준 ‘당신‘의 부재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족들에게는 집안일을 하는 제가 익숙한 모습이 되었고, 더 이상 집에서 종종거리며 하루종일 집안을 돌보는 제게 특별한 애틋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저 스스로도 경제적 이익으로 환산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점점 ‘밑바닥’으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음각‘으로 남은 제 자신을 아껴주지 못한 것 같고요.


지금은 꽤 괜찮아졌습니다.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준 이들 덕분이에요. 어쩌면 그들은 잘 모를지도 모르겠어요. 그들의 말이 제 하루를 얼마나 평화롭게 만들어주었는지요. ‘당신‘을 통해 흘러나온 ‘너는 말이야, 너는 말이야‘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고 있습니다. 그 말들은 제가 선 자리 주위에 빙 둘러진 자갈들이 되어 저를 지켜주고 있어요.


저도 ‘당신’께 그런 글을 드리고 싶네요. 삶이 자꾸 ‘나’를 지우려 할 때, ‘나’란 존재가 한없이 하찮고 비루하게 느껴질 때, ‘당신’ 주위를 빙 둘러 ‘당신’을 지키는 자갈돌 같은 글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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