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 합격 통지서
아내의 말이 곧 법이다.
숨이 꼴딱 꼴딱 넘어가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는 모든 걸 포기하고 나도 평범한 한국의 남자(?)처럼 지내고 싶은 마음이 순간순간 든다.
그래도 포기가 잘 안 되는 건 내 마음속에 이뤄내고 싶은 큰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초보보다도 못한 수준이지만 드디어 전업주부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집안일은 정말 열심히 해야지 아무런 티가 안 난다.
집안일을 하지 않으면 금방 티가 날 뿐만 아니라 집안은 엉망진창이 된다.
그 엉망진창 된 환경 속에서 집안 식구들은 모두 괴로워진다.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서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는 시작은 집안이 어떻게 정리되고 관리되느냐에 달려있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집안이다.
전업주부 합격통지서?
그건 누가 발급해주는가? 그리고 누가 가장 권위자인가?
집안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집에서는 나의 아내가 발급해주고 나의 아내가 최고 권위자다.
아내의 말이 곧 법이다. 아내의 말이 법이 된 근거는 명확하다. 그 누구도 나의 아내보다 집안일을 잘 해내는 사람이 아직까지 우리 집에는 없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났다. 우리 가정은 평범하게 지냈던 적도 많지만 그렇지 않게 지냈던 적도 많다. 나는 상당 부분 육아와 집안일에 동참했지만 육아와 집안일을 내 주도적으로 이끈 적은 거의 없었다. 최근에 아내의 일이 내가 하는 일보다 더 전망(?)이 있고 비전(?)이 있어서 아내를 바깥 세계로 몰아내고 내가 안 세계를 차지하기 위해서 삶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변화는 항상 어렵다. 그리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이 밀려온다.
그 포기의 끝자락에 아내가 드디어 합격!이라고 말해줬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일을 끝내고 집에 왔는데 너무나 집이 안정되고 좋다는 것이다.
그래 그 안정됨과 좋아 보이는 평온함 속에는 나를 버린 일들이 많이 숨겨져 있다.
아이들의 싸움, 사고, 끊임없는 집안일(청소, 빨래, 밥하기, 설거지, 다시 밥하기, 설거지, 빨래 개기, 아이들 사고 친 것들 뒤처리 하기, 화장실 청소, 다시 눈에 보이는 집안 구석구석 정리하기.. 이걸 계속 반복하기)을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지치지 않고 계속 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집안은 너무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버린다. 그 엉망인 집안에서 아이들 역시 행복해하지 못하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밖에서 일하다가 들어온 아내는 더더욱 괴로울 것이다.
꼴 딱 꼴 딱 숨이 넘어간다.
숨이 넘어가다가, 아이들에게 소리도 치다가, 혼자 괴로워하다가 이러한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왜 전업주부들이 우울증에 시달리는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나도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의 존재감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 아니 실제로 나의 존재감은 없어진다. 그것이 집안일과 육아에 시달리는 전업주부들의 우울증 첫 번째 원인일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울증에 괴로워하도록 아이들이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리고 쌓여가는 집안일 역시 나의 몸을 일으키게 만든다. 괴롭지만 그 순간을 겨우겨우 버티고 일어서서 하나씩 일들을 처리해가면 깨끗하고 정돈된 집안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정돈된 집에서 행복해하는 아이들도 본다.
물론 이 행복한 순간은 찰나다. 또 금방 집안은 어지러워진다. 그 순간 나는 또 소리친다.
"야!!!!!!!!"
그래 생고생을 해서 얻게 된 합격통지서다.
이제 초보 레벨을 달성했다. 겨우 집안을 정돈하고 간단한 요리를 할 수 있는 정도의 레벨로 시작하는 나의 주부생활이다.
초보 레벨을 달성한 기분은 그냥 감격적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이 인정해줬다는 건 나에게 큰 의미가 있다.
나의 장점과 단점을 낱낱이 알고 있는 그녀가,
나를 때로는 너무나 답답해하는 그녀가,
어떻게 가능성이 전혀 없을 것 같아서 포기하려고 했던 그녀가 인정해 준 합격 통지서다.
10년 만에 겨우 합격했으니,
남은 10년은 레벨을 열심히 올려봐야겠다.
모든 전업주부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