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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네가족 Dec 25. 2019

유혹 9, 자살이 극단적 선택일까?

 자살에 대해서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을 한다. 자살한 이와 어떠한 깊은 관계가 없는 이들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그들이 보기에는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단어를 쓰기에 적절하다. 왜냐하면 모든 이들이 삶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살이 정말 극단적 선택일까?




 내가 처음 자살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건, 군대 입대 후 훈련소 시절을 지나서 자대에 배치받았을 때였다. 훈련소는 힘들기로 유명한 3사단 백골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정말 내 육체의 한계 끝까지 훈련을 받았던 것 같은데 그 시절에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좀 더 자고 싶었고, 초콜릿 같은 걸 먹고 싶었을 뿐이다. 너무 배도 고프고 간식이 먹고 싶어서 저녁에 몰래 배급받은 건빵을 훔쳐먹다가 조교에게 걸려서 밤중에 끌려가서 조교에게 건빵을 물도 없이 한 봉지 이상을 먹도록 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벌 받으면서 먹던 건빵도 너무나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육체의 힘듬과 배고픔은 괴로웠지만, 죽고 싶은 생각이 들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훈련병 시절을 마치고 이등병, 짝대기 하나 계급장을 달고(모든 훈련병들이 우러러보는 놀라운 계급장이다.) 자대로 들어가니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더 이상 훈련소만큼 힘든 육체적 훈련은 정말 가끔 있었다. 그런데 내 위로 80명이나 되는 무시무시한 선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훈련소는 힘들었지만 같이 고통받는 동기들이 있었고,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주진 않았다. 단지 식사시간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밥을 먹고 싶었을 뿐이었다. 자대로 들어가니 식사시간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고, PX(군대에서 다양한 간식을 파는 매점)에서 원하는 초콜릿, 과자 등을 맘껏 사 먹을 수 있었다.(이등병 때는 물론 몰래 사서, 화장실에서 몰래 먹었었다.)


 정말 나를 힘들게 했던 건, 육체적 힘듬이 아닌 선임들의 정신적인 괴롭힘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괴롭힘을 동일하게 당하고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데 있었다. 훈련병 시절에는 괴로웠지만 그 고통을 같이 받고 있는 동료들이 있었고, 자대는 정신적인 고통을 오직 나 홀로 받았어야 했다. 이것이 나를 정신적으로 크게 압박했고, 그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살'이라는 걸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구나라는 걸 조금이나마 나 스스로 경험하고픈 충동도 받게 된 시절이었다.



두 번째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 건 최근의 일이다. 지금도 간혹 그러한 생각이 내 머릿속을 침투한다. 실제 자살로 실행에 옮길 만큼 위험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러한 생각 속에 사로 잡혀 있을 때는 정말 고통 속에서 어떠한 길도 보이지 않는 걸 경험한다. 


 특별한 사건이 나로 하여금 '자살'이라는 걸 생각하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아빠이지만 자주 독박 육아를 해야 하는 상황이 많이 있다. 엄마도 일을 하고 있는데, 엄마의 일이 많을 때는 내가 주로 아이 셋을 케어한다. 그런데 이일만 하지 않고 나의 일도 하면서 육아도 한다. 그리고 스케줄이 아주 빡빡할 경우가 많다. 그러니 낮에 이미 일을 하면서 상당히 에너지를 소모한 상태에서 저녁에 아이들을 픽업하면서 저녁을 하고 각종 집안일을 하다 보면 절망적인 순간에 빠질 때가 간혹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도 도와줄 이는 없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고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하는데,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아이들은 어리다. 여전히 나의 상황을 이해하기는 어렵고 이들은 자신의 충동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 여전히 어린 아이다. 성숙이 필요하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을 대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에너지가 완전히 고갈되었을 때, 나의 앞에는 절망이라는 큰 검정 그림자가 다가온다. 결국 이 큰 그림자를 뚫고 지나가거나 조용히 지나가도록 내버려 둬야 하는데 일상이 탈진상태에 가까울 때는 이 큰 그림자를 붙잡게 되는 특이한 나를 발견한다.


 자살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는 큰 그림자를 붙잡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자살도 선택임에는 분명한데 이걸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경험적으로 다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많은 것 같다. 자살을 시도하는 입장에서는 좀 더 쉬운 선택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에서 그림자를 붙잡는 건 분명 조금 쉽고 편한 선택이었지 극단적인 선택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극단적인 선택은 검정 그림자를 무시하고 밝은 빛을 향해서 강한 의지를 가지고 한 발짝 나아가는 것이 극단적인 선택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에는 자살로 가는 검정 그림자를 물리치고 희미한 빛을 향해서 무겁고 어려운 발자국을 한 발짝 움직이는 것이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에 함몰되었을 때는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과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상황임을 알기 때문이다.




[2018년 성별&연령대별 자살현황, 출처 : 중앙자살예방센터]


최근에 기사에서 40대 남성의 자살률이 가장 많다고 하여 통계자료를 찾아봤더니 70,80대 남성의 자살률이 가장 많은 걸 보게 되었다. 그리고 표를 보면 확실히 40대 이후로 남성들의 자살률이 높아지고 여성에 비하여 남성의 자살률이 월등히 높은 걸 볼 수 있다. 외국의 사례까지 찾지는 못했는데, 한국 남성의 어깨가 상당히 무겁다는 걸 이 수치가 표현해 주고 있는 것 아닐까?


[2018년 자살 원인(동기) 별 자살현황, 출처 : 중앙자살예방센터]


2018년 자살 원인을 보니 가장 큰 원인이 정신과적 문제, 경제생활문제, 육체적 질병 문제 순이다. 자살은 결국 개인의 정신세계가 어려운 상황을 감내하지 못하고 선택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경제적인 문제도 결국에는 정신세계에 어려움을 주고, 육체적 질병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였을 때, 인간은 이를 이겨낼 힘이 절실히 부족한 듯하다.



외부에서 보면 자살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에게는 그 길밖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선택이라는 단어를 거부할지도 모르겠다. 깊은 어둠 속에서 절망을 경험해본 이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은 살아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면 결국 타인에 의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고 비난받을 수 있는 것이 자살이다. 자기 삶의 외형을 키우기보다는 내면을 키울 수 있는 힘을 길러내는 것이 자살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초석을 쌓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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