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되었다. 소방관들이 바빠지는 계절이 왔다. 옛날(?) 내 고참 한분은 11월이 되면 이런 말을 하곤 했었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겨울철이 되었으니 이제 우리도 뛰어보자!"
그분은 불이 나지 않고 야간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퇴근하게 되면 '밥 값 못했다'며 아쉬워하던 천상 소방관이셨다. 그래서 11월이 되면 이제 우리 소방관들도 한철 메뚜기처럼 기를 펴는 때가 되었다며 반기곤 하셨다. 물론 요즘 신입 소방관들이 보면 공감하기 어려운 말일 것이다. 불은 안나는 게 좋지, 나는 게 뭐가 좋냐고... 하지만 그때는 분위기가 그랬다. 불이 나야 소방관들도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통해서 제 밥그릇을 찾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11월로 들어서면 '불조심 강조의 달'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행사를 했다. 관내에 있는 산이나 전통시장을 찾아가서 위에서처럼 플래카드를 펼쳐놓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산을 오르는 등산객이나 전통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불조심 예방 캠페인을 하고 일일이 불조심 홍보물을 나눠줬다.(소방서에는 유관기관으로 '의용소방대'라는 조직이 있는데 화재가 나면 소방관들을 도와서 불을 끄고, 평상시에는 이처럼 캠페인이나 홍보활동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119 불조심 포스터나 소방차 그림 그리기 대회를 하는 것도 이맘때이고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119 소방동요 대회를 시상하는 것도 이때쯤이다.
유치원 고사리손들이 써 준 손편지-이런 편지를 가장 많이 받는 것도 이 때쯤이다
11월이 불조심 강조의 달이 된 데에는 11월 9일이 소방의 날이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날만은 소방관들의 생일이라며 소방본부에서는 일선 119 안전센터들에 특식(?)을 나눠주고 의용소방대원들과 함께 체육활동을 하며 일 년에 하루나마 즐겁게 지내도록 배려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고참들도 그렇게 소방의 날이 오면 특식을 먹고 하루를 즐긴 덕분에 그 해 겨울에 더욱 힘을 내서 불을 끌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요즘은 11월이 되었다고 해서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명목상 '불조심 강조의 달'이 있기는 하지만 예전 같지 않다. 코로나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제일 위의 사진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가 없으니 작년에는 조용히 넘어간 듯하다. -올해도 아마 그럴 것 같다.- 하기야 이제는 겨울철이 되어서 불이 많이 난다거나 소방관이 바빠진다는 말도 옛말이 되어버렸다. 요즘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가리지 않고 자연재난이 발생하고 소방관들은 항상 바쁘다. 그래서 겨울이 왔다고, 11월이 되었다고 해서 유난 떨 것 없다는 말이다. 이미 퇴직한 그 고참이 다시 소방서에 온다면 썰렁해져 버린 '불조심 강조의 달' 행사장에서 아쉬워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를 둘러싼 소방환경은 달려져 가고 있다. 예전에는 목조 건물이 많아서 겨울철이 되면 불이 많이 났고 그 불을 끄는 것이 우리 소방관들의 주된 임무였다면 이제는 대부분의 건물이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지고 있어서 겨울이라고 불이 그렇게 많이 나지는 않는다. 불이 많이 나는 계절이 따로 없이 사계절 내내 화재는 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소방관들은 불 외에도 폭우나 태풍, 벌집제거나 산사태와 같은 자연재난과도 싸워야 한다. 특히 지난번 쿠팡 물류창고 화재나 울산의 미용실 화재는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6월 말에 있었다.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대충 생각해 보면 소방관의 일은
초봄에는 산불화재, 임야화재(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면서 산불등이 많이 난다)
늦봄에는 창고화재, 상가 화재(신축건물도 생기고 본격적으로 업무가 바빠지는 경향도 있다.)
초여름에는 수해, 기습폭우(장마와 더불어 기습폭우가 빈번해진다.)
늦여름에는 태풍, 벌집제거(태풍과 함께 벌집도 무르(?)익는다.)
가을이 오면 주택화재, 산사태(아무래도 불의 사용량이 늘어나고 산야는 건조해진다.)
겨울에는 공장 화재, 고드름 제거(기계가 과부하 걸리고 온도가 급강하 한다.)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러하다 보니 메뚜기는 한철이라는 말도, 소방관은 겨울에 제일 바쁘다는 말도 이제는 바뀌어야 할 것 같다. 11월도 불조심 강조의 달이라기보다 소방의 달로 바꾸면 어떨까?
여기에다가 일 년 내내 고생하는 구급대원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그들은 코로나가 처음 터진 시점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방호복을 벗지 못하고 흔들리는 차 안에서 코로나 환자의 응급처치와 구급대원 폭행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싸우고 있다.
구급출동을 나가기 위해 방호복을 입는 구급대원
이처럼 우리를 둘러싼 소방환경은 변해 가는데 여전히 소방관의 임무는 불을 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소방관의 임무는 점점 다변화되고 있다. 불을 끄는 것은 기본이고 계절에 따라 위에서처럼 일어나는 자연재난에도 늘 대비해야 하고, 수시로 일어나는 교통사고 구조출동, 주택 문개방 구조출동, 동물 구조 출동처럼 구조출동도 계속해서 늘고 있다. 그리고 구급 분야는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코로나로 인한 격무의 연속이다. 이렇듯 사계절 밤낮 가리지 않고 불러주는 대로 달려가는 소방관들에게 소방의 달 11월을 맞아서, 11월 9일 소방의 날을 맞아서 옛날에 그 고참처럼(?) 더욱 힘내자고 파이팅을 외쳐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