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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방관아빠 무스 Apr 11. 2022

소방관의 정신건강(1)-라면의 추억

소방관으로 살아간다는 것(20)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소방관의 정신건강은 이미 염려스러운 수준에 이르렀다. 사고 현장에서 순직하는 소방관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방관의 수가 더 많다니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소방관들의 일상을 살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화재, 구조, 구급현장에서 참혹한 상황을 몸소 접하는 일이 부지기수고, 그것도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20년, 30년 축적되다 보면 그 사람의 정신건강이 온전할 리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취객 등의 폭행에도 노출되어 있지, 민원인들의 불만까지 응대하다 보면 소방관의 정신건강은 그야말로 시궁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신 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2017년도부터 5년간 현장 소방관의 목소리를 들으며 소방관을 위한 심리상담을 APP 서비스 'hearO'를 개발 중인 '소명팀'이었다. 그들에게서 소방관과 그 가족들을 위한 hearO 칼럼에 글을 써 줄 것을 제안받고 흔쾌히 수락을 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글을 여기에 써보기로 했다. 


라면의 추억


   2000년, 내가 부산에 있는 S소방서에 처음 신입으로 발령받고  한두 달 정도 됐을 때의 일이다. 처음 발령받은 신입대원이다 보니 아직 현장 경험이 없었고 발령받은 안전센터에서 불이 나기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러면서 소방학교에서 배운 여러 가지 훈련들은 선임 소방관들의 지도하에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날은 구급대원 한분이 휴가를 간 날이었다. 그래서 신입직원인 내가 그 사람의 땜빵(?)으로 구급차를 타게 되었다. 소방학교에서 구급교육은 받았지만 정식 구급대원은 아니었기 때문에 좀 긴장되는 건 사실이었다. 나머지 두 명의 선배 구급대원은 너무 쫄지 말고 자기네들 시키는 대로 들것이나 잘 들면 된다고 했다. 나머지는 자기들이 알아서 할 테니 잘 따라오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번 출동이 걸려서 따라나가보니 환자를 주들것 위에 올려서 구급차에 태운 후 병원에 모셔주고 오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작업이었다. 그래서 긴장을 풀고 선배들과 농담도 주고받으면 가벼운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두 번째 구급출동이 걸렸다. 그런데 두 번째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구급출동!, 구급출동!, 익수사고 발생!

   농담을 주고받던 선배들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구급차로 튀어가더니 사이렌을 켜고 차고를 빠져나갔다. 그때 우리 119 안전센터 앞에는 다대포 해수욕장이 있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부산에서 별 인지도 없는 해수욕장에 속했다. 부산 사람도 잘 모르는 부산 외곽의 한 해변. 그게 다대포 해수욕장의 그때 모습이었다.(지금은 지하철이 연결되어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찾고 있지만) 그런데 당시에 그곳은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겐 유일한 놀이공원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토요일이었던 그날도 몇 명의 중학생이 학교를 마치고(그때는 토요일 오전도 수업을 했던 때였다~놀랍게도~) 거기서 수영을 하며 놀고 있었던 것이다. 다대포 해수욕장은 여느 해수욕장들과는 다르게 수심이 낮다. 해변에서 한참을 바다로 들어가도 바닷물이 허리까지도 올라오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수심도 얕고 파도도 심하지 않아 아이들과 같이 놀러가기에 좋은 해수욕장이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드넓은 백사장에는 커다란 웅덩이가 몇 개 있는데 거기는 갑자기 수심이 깊어지는 곳이 있었다. -녀석들이 얕고 놀기 좋은 해수욕장을 놔두고 물도 더러운 그 웅덩이에서 왜 놀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해수욕장은 너무 깊이가 얕아 수영하기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지금은 몇 번의 공사로 그 웅덩이들은 다 메워지고 그곳은 갯벌과 데크길로 꾸며져 '고우니 생태길'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지만 당시엔 학교를 마친 그곳의 중학생들이 놀 곳은 거기밖에 없었나 보다.


(다대포 해수욕장-지금은 웅덩이가 갯벌로 변신하여 그 위에 데크길이 생겼다, 일명 고우니 생태길)

   

(드넓은 백사장- 지금은 웅덩이가 메워지고 일명 카이트 서핑의 명소가 되었다.)

 

   어쨌든 사이렌을 켜고 도착한 그곳은 구경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웅덩이 안에서 먼저 도착한 구조대원이 슈트를 입고 스킨 스쿠버 장비를 차고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이 보였다. 한 구조대원이 거기서 마네킹 같은 사람을 끌어올렸는데 그는 키만 멀대같이 크고 빼빼 마른 데다 까맣게 그을린, 수영복만 입은 중학생이었다. 우리는 그 구조대원에게서 중학생을 인계받아 주들것 위에 눕혔다. 그리고 한 선배는 가슴압박을 하면서, 나와 나머지 한 선배는 중학생을 태운 주들것을 구급차로 옮기기 시작했다. 다대포 해수욕장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모래사장이 평평한 편이 아니었다. 드넓은 데다 계속 불어대는 바닷바람의 영향으로 여기저기 언덕과 웅덩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 언덕을 오르면서 몇 번이나 주들것의 바퀴는 모랫속에 빠졌다. 한시라도 빨리 그 중학생을 병원까지 옮겨야 하는데 CPR을 해 가면서, 모래와 사투를 벌여가면서 주들것을 끄느라 오뉴월 땡볕에 팥죽 같은 땀이 머리에서 얼굴로 흘러내렸다. 


(구급차 주들것-이걸 끌고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다음 까페 갈무리)


   겨우 주들것을 끌고 구급차에 이러렀을 때 우리는 또 한 번의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중학생은 이미 동공반사가 없었고 호흡도 없었다. 그래서 기도를 확보하고 앰부백으로 호흡을 불어넣으려 했는데 기도가 무언가로 꽉 막힌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물론 익사자니까 기도엔 바닷물이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복부 쳐올리기로 그 바닷물을 빼내려 했으나 바닷물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중학생의 기도와 식도를 막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미 불을 대로 불어 터진 '라면 면발'이었다.


(앰부 백-위쪽 마스크를 환자의 입과 코에 대고 아래 주머니를 눌러 산소를 공급했다.-다음 까페 갈무리)


   그렇다!, 그 중학생은 해수욕장으로 수영하러 오기 전에 집에서 라면을 먹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화되지 않고 불어 터진 라면 면발이 식도와 기도를 막으면서 기도로 공기를 불어넣을 수 없었던 것이다.(그때는 CPR의 정석이 가슴압박:호흡보조 15:2였다.) 우리는 최대한 그 중학생을 엎드리게 하고 등을 치면서 식도와 기도에 막힌 라면 면발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었다. 물에 빠져 의식과 호흡이 없는 중학생의 입에서 불어 터진 라면 면발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이십여 년 전의 그 중학생의 입을 막고 있던 라면 면발이 생각난다. 


   그 뒤로 나는 그 좋아하던 라면을 한동안 먹지 못했다. 라면만 보면 축 쳐져있던 그 중학생의 얼굴이 생각나 헛구역질이 나왔다. 더불어 뜨거운 백사장에 내리쬐던 태양과 모래언덕에 빠져 헛돌던 주들것의 바퀴, 그리고 머리에서 흘러내리던 팥죽 같은 땀방울을 느끼기도 했다. 


   우리는 최대한 빨리 중학생의 입에서 라면 면발을 끄집어내고 CPR을 하면서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DOA(도착 시 사망, Dead On Arrival) 판정을 받았다. 그 사건으로 며칠 동안 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우리가 주들것을 모래사장에서 좀 더 빨리 밀고 갔다면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라면 면발을 좀 더 빨리 제거했더라면?, CPR을 좀 더 제대로 했더라면?... 이런 생각들이 머리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겨우 두 번째 출동만에 이런 시련을 주시다니... 난 보이지 않는 어떤 절대자를 원망하는 마음마저 생겼다. 그렇지만 두 선배들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살릴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우리가 모든 요구조자를 다 살릴 수는 없다고 했다. 그건 그 사람의 운명이므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한동안 의기소침해 있는 나에게 야식으로 라면을 끓여주었다. 누구나 처음엔 그런 거라며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같이 먹어 보자며 나에게 젓가락을 내밀었다. 그 선배들의 도움으로 난 얼마 후, 다시 웃으며 라면을 먹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선배들이 없었다면 아직도 내가 이 소방복을 입고 여기서 근무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사의 고락을 같이 넘나들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내 손을 잡아주었던 수많은 동료들! 그들 덕분에 나도 지금까지 살아남아 여기서 다시 누군가를 살리고 있다. 그래서 그 뒤로 나의 후임들이 들어와서 힘든 출동으로 의기소침해 있을 때 그의 어깨를 두드려줄 수 있는 선배가 되자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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