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기사에서처럼 소방관들의 자살자의 수는 지난 10년간 순직자의 2배에 이른다. 이렇듯 소방관들의 자살이 되풀이되는 것은 지난 회에서도 언급했지만 생사를 오가는 화재, 구조, 구급현장에서 맞닥뜨린 몸과 마음의 트라우마, 신고자나 민원인의 민원제기 및 상사, 동료와의 갈등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며칠 전 국제 소방관의 날에 경기도 과천소방서에서는 새내기 소방관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고 한 달 전쯤 우리 부산소방본부에서도 한 직원이 극단적 선택으로 운명을 달리했다. -두 분 다 어떤 연유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소방관이라는 직업에서 오는 어려움이 그 선택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기에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나도 부의금을 전달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점점 더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또한 23년간의 나의 소방 경험이 앞으로 또 있을지 모를 그들의 선택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오월의 꽃같이 아름다운 두 분 소방관님의 명복을 빕니다.
손가락 열상
그때는 2010년 초봄이었다. 연도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그 해가 내가 소방서에 들어온 지 딱 10년 차가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소방서 10년 차, 어느 정도 현장 경험도 쌓이고 계급도 좀 높아져서 목에 힘을 주고 싶기도 하고 자기 밑에 후임들도 제법 들어와서 현장에 가게 되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후임들의 눈을 의식하게 되는 때이기도 하다. 그때 내가 딱 그랬던 것 같다.
명지 대파밭과 아파트촌-다음 까페 (수영문화원 사진아카데미) 갈무리-
지금은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인 부산 명지 국제신도시-서울의 명지가 아님 주의-지만 그때만 해도 그곳은 드넓은 대파밭?으로서 낙동강 하구에서 대를 이어 살던 사람들이 대파 농사와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곳이었다. 그때는 또한 내가 강서소방서에 발령받아 일이 년 정도 내근업무를 하다가 다시 119 안전센터로 내려와서 소방차를 타고 화재진압대원으로 활동하던 때이기도 하다.
"화재출동!, 화재출동!, 명지동 농막 화재!"
농막이라 함은 농사를 짓는 데 쓰는 괭이나 호미 등 농기구를 보관하거나 때로는 농산물을 보관하는 일종의 창고 구실을 하는 막사를 말한다. 이제 본격적인 농사철이 다가오니까 그런 농막에도 불이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보통 농막은 농경지 부근에 있는 데다 사람도 거주하지 않기 때문에 인명피해나 재산피해도 미미한 편이라서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소방차에 올라탔다. 요즘은 그것도 보통 한동짜리 컨테이너 박스로 많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 정도는 몸풀기로 가볍게 끄고 오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남양주시 컨테이너 농막 화재-이강안의 와글와글 블로그 펌-
현장에 도착해 보니 예상한 대로 한동짜리 컨테이너 박스가 통째로 불타고 있었다. 주위엔 사람이나 다른 건물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유 있게 소방차에서 호스를 연결해서 거기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몇 분 후, 불이 잦아들고 흰 연기만 모락모락 피어나는 상태가 되었다.
"방수 중지!, 이거 저기로 옮기고 이쪽에 방수 좀 해 봐!"
불이 웬만큼 꺼지자 팀장님은 바깥에서 물을 뿌리는 것을 중지하고 안에 쌓여있던 물건들을 치우고 불씨가 남아있는 농막 안쪽으로 물을 뿌리라고 말했다. 우리는 일단 호스를 잠그고 농막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직 열기는 남아있었지만 불은 거의 꺼져서 시야는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 그 안에 보니 컨테이너 박스 공사를 하고 남은 것인지 샌드위치 판넬들이 많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 때문에 안쪽에 남은 불씨엔 물이 도달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안에 들어가 그 판넬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불에 탄 샌드위치 판넬은 좀 뜨거웠지만 그걸 옮기지 않고서는 완벽한 화재 진화가 될 수 없었기에 한 사람씩 그걸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나씩 들고 나왔으면 될 텐데 나는 후임들 보란 듯 몇 개를 한꺼번에 바깥으로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걸 바깥으로 들고 나와서 땅에 놓는 순간!, 손가락에 뭔가 짜릿한 것이 손가락을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장갑을 벗고 보니 왼손 약지 첫마디 부분이 베어져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샌드위치 패널을 감싼 철판에 손가락이 베인 것이다.
지금은 소방관의 장갑이 방수 기능은 물론 내열기능까지 갖춘 특수 원단으로 생산되어 나오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소방관의 장갑은 일종의 고무장갑에 바깥에는 적당히 두꺼운 코팅을 해서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 그걸 끼고 날카로운 샌드위치 패널을 들다 보니 그 철판에 손가락을 베이고 만 것이었다. 난 지혈을 하고 반창고라도 하나 바르면 되겠거니 하고 구급차에 가서 구급대원들에게 응급처치를 해달라고 했지만 구급대원은 출혈이 멈추지 않는다고 하면서 병원에 가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팀장님에게 보고하고 구급차를 타고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갔다. 의사는 정밀검사를 해 보더니 왼손 약지의 신경과 힘줄, 인대가 손상되었다고 봉합수술을 하고 재활치료까지 해야 한다고 했다. 소방활동에 장애가 되는 샌드위치 패널을 한번 옮긴다고 들었을 뿐인데 너무나도 참혹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날 바로 입원을 하고 봉합수술을 했다. 신경과 힘줄을 잇는 수술이기 때문에 간단한 수술을 아니라고 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소식을 듣고 아내와 애들이 왔다. 둘째는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는 날 보더니 한달음에 뛰어와 안기며 눈물을 흘렸다. 붕대로 칭칭 감겨진 내 손을 보더니 한번 더 울었다. 아내도 마음이 안 좋은지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내 손을 잡으며 그래도 이만하니 다행이라고 힘을 내라고 했다. 첫째도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 아내의 말을 듣고 애들을 보니 내 눈에서도 눈물이 났다. 하지만 가족들의 응원을 받으니 그나마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나는 거기서 봉합수술을 받았고 재활치료도 열심히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2년이 흘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왼손 약지 첫 번째 마디가 약간 벌벌 떨린다. 아직도 움직이는데 부자연스럽고 어떤 날은 꼭 내 손가락이 아닌 것 같이 의뭉스러울 때가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직도 저릿하기도 하다. 그때 가까운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지 않고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문 병원에 가서 봉합수술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10년도 더 지난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나마 완전히 잘리지 않고 그렇게 베이기만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봉합수술을 받고 몇 달에 걸친 파라핀 치료와 물리치료를 거쳐 지금은 그래도 조금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은(?) 왼손 검지 한마디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좌-현재 사용중인 소방관 장갑, 우-2010년 당시에 내가 꼈던 소방관 장갑)
부상을 당하고 공상처리(공무 중 다친 재해사고 처리)를 하고 십 년이 더 지났지만 그 사고로 인해 치료비 외에 다른 어떤 혜택을 받아본 적은 없다. 소방서에서 손가락 한마디 베이는 부상은 어디 가서 말하기에도 민망스러운(?) 수준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어디가 부러지거나 심한 화상을 입거나 장애등급 정도는 받아야지 공상이니 부상이니 말이나 꺼낼 수 있는 것이지, 소방활동 중 사망하는 사람이나 장애판정을 받는 사람도 있는데 그깟 손가락 한마디 베었다고 엄살떠는 것 같기 때문이다. -소방관들은 그 정도 부상은 그냥 일상 다반사인 것이다.-
하지만 그 부상은 내 손가락은 물론 내 마음에도 작지만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 아직도 화재 현장에 가서 불에 타고 남은 뭔가를 장갑낀 손으로 옮길 때는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될 수 있으면 갈쿠리나 다른 도구를 쓰지, 손으로 뭔가를 옮기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소방관들도 아마 그런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면서 마음속에 몇 가지 트라우마가 남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가족들의 응원이나 동료들의 위로로 보통 치유가 되긴 하지만 몇몇은 마음속 깊이 트라우마로 남는다. 그런 것을 진정으로 치유하려면 서로 간의 대화가 필요하다. 동료들 간, 가족 간 그런 일을 서로 나눔으로써 자기도 치유받고 상대방은 그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아, 그래서 저 사람이 그랬구나~"
그렇게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면 그의 행동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를 배려하게 되고 그러면 다시 그 사람의 트라우마는 치유받게 된다. 그런 대화와 나눔의 선순환을 위해 나도 내 경험과 트라우마를 여기에 풀어놓는 것이다. 그것이 마중물이 되어 더 많은 소방관의 트라우마가 이해받고 또 치유되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소방관들이 점점 줄어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