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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a Apr 08. 2021

그가 품은 진실

슬슬 출발해야 한다.


 오늘 오랜만에 친정에 들러 주말농장을 살피기로 한 날이다. 주말농장은 어머니의 우울증을 걱정한 아버지가 섭외한 곳으로 매년 봄이 되면 땅을 일구고 이것저것 간단한 씨앗이나 모종을 경작한다. 어머니는 점점 더 증세가 심해져서 어쩌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라볼 것 같았다.

 친정은 언제나 가기 싫은 곳이다. 내가 이혼을 한 후로 더욱 거북한 곳이 되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내가 하는 일을 못미더워했다. 여자애가 무슨, 이라고 항상 대화의 어미에 관용사처럼 붙여서 말씀하시는 어머니는 종종 나와 터울이 있는 오빠를 비교하곤 했다.


 네 오빠처럼 살아라. 그것은 어머니가 내게 자주 거는 주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와 끊임없이 비교당해야 했다. 그 주문은 차갑고 어두워서 듣는 족족 나의 귀를 얼어붙게 찢었다.

 네 오빠처럼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라. 네 오빠처럼 공부를 진득하게 해 보아라. 네 오빠처럼 울지 말고 얌전히 학습지를 풀어라. 그렇게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오빠는 스무살이 되던 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우수한 성적으로 유망한 의대에 합격했다고 하여 부모님은 한껏 기대에 들떠 있었다. 친척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돌려서 역시 우리 아들, 하며 자랑스러운 말투로 으스댔다. 내가 해준게 뭐가 있어, 워낙 어릴때부터 알아서 척척 다 했잖아. 어머니의 말투는 극한의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어린 나는 그런 어머니가 너무 견뎌내기 버거웠다. 오빠의 모습은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친구들과 신나게 회포를 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가 연락도 하지 않고 무단으로 외박을 했을 때에도 부모님은 그저 별 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넘겼다. 고없이 길어진 박은 연락두절과 섞여 결국 심상치 않은 상황을 조영했다.


실종신고 일주일 만에 모습을 드러낸 오빠는 가족이 알고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누구도 그 불어터진 덩어리가 오빠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경찰이 내민 유전자 검사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오빠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교 다리 밑에서 경찰이 온통 바닷물에 불은 그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믿을 수가 없어서 한껏 부정했다. 그 다음엔 유서가 발견되기 전까지 그가 타살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가 스스로 삶을 포기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어 보였기에. 때문에 마주한 진실은 폐로 바닷물이 넘어가는 것만큼이나 매캐하게 찌르듯 아팠다.


 그는 오랜 기간 모의고사 성적표를 조작했다. 한 치의 기적을 바라며 수능에 임했으나 결국 어느 대학에도 가지 못할 성적이 나왔고 부모에게 이 모든 것을 고백할 용기가 나지 않아 목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멍청하고 한심한 죽음이었으나 그의 죽고 싶을 만큼 불안했을 마음 또한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의 죽음을 최종적으로 종용한 건 그 자신이 아닌 부모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어머니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네 오빠처럼 살아라, 라고 말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입에서 그 소리가 쏙 들어갔을 때 나는 혈육을 잃은 슬픔보다 조금 더 큰 통쾌함을 느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도리와 가치가 하루 아침에 뒤바뀌는 순간, 그녀가 미치지 않은 것이 아쉬웠을 뿐이다. 

 머니는 종종 오랜 시간 동안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았고 아버지는 그런 그녀가 갑자기 창 밖으로 날아오르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녀는 마치 새 같았다. 날개가 꺾인 채 손아귀에서 파르르 떠는 힘없고 연약한 새처럼 보여서 이따금 나도 그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창 밖으로 날아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날아가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축복과도 같았기에.


 나는 적당한 대학에 진학하여 졸업 후 조그만 사업을 시작했다. 오빠의 사고 후 부모님은 더 이상 내가 무엇을 하든 터치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했다. 엇이든 하고 싶은 것을 했고 떠오르는 상상을 현실로 옮겼다. 하지만 결혼만큼은 아니었다.


 결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의 성향을 친정에는 알리지 않았다. 애써 고백할 용기도 이유도 없었다. 그들의 지원을 받아 시작한 사업이었기에 자금 조달을 위해선 친정과의 유대가 필요했다. 적당한 나이가 차자 끊임없이 밀려오는 선자리 중 나쁘지 않은 남자를 골라 결혼했고 애초에 사랑 없이 목적과 수단이 분명한 결혼생활은 곧 끝이 보였다. 남편과의 일상은 물기 없이 메마르고 건조한 섹스만큼이나 지루했다. 애써 애정을 연기할 수는 있으나 사랑이 의무감이 되는 순간 지겨워지기 마련이다. 가끔 나는 견딜 수 없는 그와의 잠자리를 위해 희를 상상하곤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 순간을 견뎌낼 수 없어서 피하거나 거부했다.

  

 절정의 순간에서 희의 이름을 높이 부른 후로 희와 나와의 관계를 의심한 남편은 결국 내 핸드폰을 추적하고 사람을 붙여 기어이 은 진실을 마주했다. 오랜 시간 괴로워한 남편은 끝내 나와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또한 나를 유책배우자로서 소송하겠다고 협박했다. 사회와 친정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바라지 않은 나는 그에게 같이 살던 아파트를 넘기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 아파트는 내가 처음 시작한 사업이 성과를 보여 구매한 것으로 의미가 깊은 곳이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도, 한 집의 딸으로도 잃을 것이 많았던 나는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그저 그깟 아파트 대신 나의 희를 챙겼을 뿐이었다. 당시엔 희가 내게 주는 무게가 그렇게도 컸다. 희와의 관계가 이렇게 될 줄을 알았다면 나 또한 고민을 해보았을 것을, 당시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친정으로 가는 길은 차로 한 시간 반 거리를 줄곧 달려야 했다. 도로를 따라 온통 늘어진 벚꽃나무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풍성하게 피어난 벚꽃잎은 그대로 하나의 열매 같이 몽글하게 맺혔다. 한 웅큼씩 똑 따서 입 안에 넣으면 봄의 향연이 아지라히 혀 끝에서 솟아날 것만 같다. 바람이 불자 꽃잎을 알알히 품은 가지가 세차게 흔들리며 비를 흩뿌리듯 꽃잎을 내렸다. 차의 앞유리에 빗방울처럼 온통 꽃잎이 떨어지며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봄 비보다 더 한 봄의 신호였다.


 한때 희를 내 봄의 전부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봄을 상징하는 모든 것이 그녀의 이름일 때가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 벚꽃잎을 꽂으며 까르르 얼굴을 마주하고 웃던 때가 있었다. 온 세상에 우리 둘만으로 꽉 차있던 때가 있었다. 희를 부르면 입안 가득 싱그러운 향기가 차오를 때가 있었다. 자다가 희를 생각하면 괜히 눈물이 차올라서 마음이 아려오던 때가 있었다.


 봄이 오면 희가 좋아하는 꽃게를 가득 사서 도란도란 쪄먹곤 했다. 희는 수산물을 좋아했다. 꼬득꼬득한 알이 가득 밴 쭈꾸미나 주황색 알을 가득 품은 꽃게를 그녀는 잘도 먹었다. 맛있게 먹는 그녀의 모습이 좋아서 우리는 해마다 봄만 되면 자갈치 시장에 가서 꽃게며 쭈꾸미를 직접 골랐다. 죽은 해산물을 먹지 않는 그녀를 위해 나는 항상 살아있는 꽃게를 직접 손질했다. 손질하기 전 봐, 살아있지? 라고 그녀에게 꿈틀대는 해산물을 보여준 후 손질을 시작하곤 했다.


 장갑을 낀 손에 끈덕지게 달라붙는 쭈꾸미의 다리를 밀가루로 바락바락 씻어내고, 거품을 뱉어내며 집게발을 위협적으로 부딪히는 꽃게의 배딱지를 칫솔로 문질렀다. 그녀를 맛있게 먹이기 위해서라면 살아 움직이는 그것들이 징그럽지 않았다. 늦은 오후의 봄 볕이 가득 들어오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거실에서 그녀와 함께 둘러 앉아 게를 한 마리씩 들고 젓가락으로 살을 발라먹고 있으면 이보다 더 평안할 수가 없었다.


 게를 삶아낸 물에 된장을 슬 풀 쪽파를 쫑쫑 썰어 소면을 말아 주면 희가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했다. 그 눈웃음이 보기 좋아서 나는 매년 게를 삶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깜빡일 때 입술로 쪽, 소리를 내며 빨려 들어가는 면을 보는 게 좋았다. 오직 희 때문에 깨끗하게 손질한 암꽃게를 살짝 얼려 각종 채소와 과일을 함께 끓여낸 간장에 사흘 정도 숙성시킨 게장을 매년 담았다. 올 봄부터 하지 않게 될 번거로운 정성이었다. 한 번도 번거롭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으나 앞으로는 번거로운 추억이 될 같잖은 기억이었다.


 주말 농장은 친정 근처의 황령산 아래 있었다. 아버지는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모종과 씨앗 등을 사기 위해 잠시 옆 동네에 들렀다고 했다. 농장에 도착하려면 삼십 분은 걸릴 곳이었다. 그 전에 홀로 미리 땅을 갈아 놓기로 했다. 농장 주인은 힘도 하나 없어 보이는 여자분이 오셨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새벽에 한 차례 비가 내렸기에 황령산 자락엔 온통 산안개가 자욱하게 리잡고 있었다. 아득히 치솟은 산 봉우리마다 나긋하게 걸린 구름이며 안개자락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저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릴 적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어머니는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셨다. 내가 그려놓은 정물화나 수채화 등을 일일히 눈 앞에서 찢어냈다. 이런 것으로는 밥벌이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친정은 밥벌이를 걱정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는데도 번번히 어머니는 내게 자립을 요구했다. 오빠에게는 단 한 번도 강요되지 않은 단어였다. 소위 밥벌이를 할 정도의 위치를 마련하고 나서야 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붓과 물감 등을 구입했으나 도저히 그 오래 전 그리던 맛이 나질 않았다. 손 끝에서 붓질이 홀로 살아있다는 듯 자유롭게 미끄러지지 않았다. 빈 캔버스에 무엇이든 표현해야 하는데 도저히 그 붓이 스스로 움직이질 않았다. 하고 싶은 일도 오랫동안 손을 놓으면 낯설어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나에게서 앗아간 것이 비단 자유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안 순간 나는 그녀를 극도로 증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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