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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a Apr 08. 2021

학대의 정석

 농장 주인이 준 삽은 무거웠고 손에 익지 않았으나 나는 묵묵히 장갑을 끼고 비료 포대가 놓아진 자리에 섰다. 작은 푯말로 내 이름이 쓰여진 4평 남짓한 밭은 수돗가가 근처에 위치하여 작업이 수월해 보였다. 아버지는 이 곳에 상추며 우엉, 쑥갓 등을 심겠다고 했다. 남는 공간이 있으면 감자나 고구마를 심겠다고 했다.


 어머니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시작한 주말 농장인데도 더 신이 나보이는 것은 아버지였다. 그 많은 작물을 다 심지 못할 만큼 작은 공간이었는데 수화기 너머의 아버지는 들뜸을 감추지 못한 채로 자신이 심을 작물들을 열거했다. 나는 삽으로 비료 포대를 갈라 땅에 고르게 뿌리고 차근차근 갈아엎기 시작했다. 농장 주인은 땅을 갈아 엎는 방법을 알려 주겠다고 나를 따라왔다가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얼떨떨해 하며 돌아갔다. 가장 끝에서부터 시작된 갈아엎기는 간단하다. 삽 머리를 발로 밟아 땅 깊숙히 찔러 넣고 퍼올린다. 간단하고 누구나 익숙해 질 노동이다.


 작지만 노동을 하기엔 다소 넓은 면적의 밭 거의 다 갈아 엎었을 무렵에야 아버지가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는 여전히 낯설었다. 안 본 사이 좀 더 늙어진 것도 같았다. 새벽에 비가 내려 축축하고 군데군데 질퍽해진 땅은 삽을 갖다 대면 벌레들과 지렁이가 꿈틀댔다. 나는 벌레를 극도로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의 그 데면데면한 분위기에 도무지 호들갑을 떨지 못했다. 말도 없이 아버지와 함께 고랑을 파고 땅을 고르게 다진 후 파와 상추 모종 따위를 심었다. 오랜만에 하는 노동에 어깨와 허리가 아팠다. 정수리부터 시작된 땀은 온 얼굴과 몸으로 끊임없이 굴러 떨어졌으나 흐뭇하고 뿌듯한 마음 또한 한켠에 들었다. 쑥갓과 아욱 씨앗을 손에 쥐고 슬슬 흩뿌렸다.


 씨앗을 뿌리는 것과 한때 생명이었던 뼛가루를 뿌리는 느낌은 동일하다.


감히 힘을 주어 꼭 쥐지 못하고 행여나 망가질세라 살며시 손에 품은 채 바람에 맞춰 흩날리듯 뿌린다.

 하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이고 하나는 이미 저물어 간 생명이었다. 하나는 뿌리며 부디 건강하게 잘 자라나기를 바라고 하나는 뿌리며 부디 다음 생에는 행복하기를 바란다.

 오빠의 뼛가루를 납골당에 안치하는 대신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뜻으로 바다에 뿌리자고 한 건 나의 생각이었다.  


 오빠는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집 안에 갇혀 있었다. 오빠가 굳이 대교 밑으로 몸을 던진 이유는 더 이상 한 공간에 머물러 있지 않고 멀리 나가기로 결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선택한 길은 대양으로 통한다. 그는 아마 바다로 가서 보지 못했던 드넓은 세상을 마주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강력하게 오빠를 놓아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머니는 이미 오빠의 죽음으로 큰 상처를 받았기에 더 이상 오빠를 잡고 있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느 쪽이든 상관 없어 보였다. 미 우리는 오빠를 잃은 지 오래였다. 가족의 꿈이었던 그를 놓친다는 것은 허망한 다른 삶으로의 인도였다.


나는 오빠가 이전에는 불행했으니 지금부터라도 그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나로 인해 비로소 오빠의 지친 육신은 더 이상 갇혀 있지 않고 꿈꾸던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죽음과 맞바꾼 자유였다.


 온통 땀에 젖어있는 내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근처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 오신다. 어릴 적부터 딸기 우유만을 마시던 나의 취향을 기억하지 못한 아버지는 내게 사이다를 내민다. 나는 옛날부터 탄산음료를 마시지 못한다.


그 자유롭게 톡톡 튀는 청량감을 도무지 순한 편도가 이겨내질 못했다. 나는 아버지의 성의를 봐서 잠자코 한 모금 넘겼다. 쏴, 소리를 내며 내 목을 집어 삼킬 듯한 노도같은 탄산감이 밀려올 때 나는 헛구역질을 했다. 달짝지근하고 향긋한 딸기 우유가 필요했다.


 희가 가장 좋아하는 색상은 딸기 우유색이다. 분홍색에 흰색 물감을 듬뿍 섞어 올리면 희가 좋아하는 색상이 나온다. 요즘 딸기 우유는 그 색이 아니다.

 시대가 발전하며 건강에 예민해진 사람들을 위해, 딸기우유는 예전과 달리 색소를 첨가하지 않아 흰 우유에 가까운 색상을 낸다. 바나나 우유도 거의 흰 색으로 나온다.


 나는 아버지 몰래 편의점에 가서 딸기 우유를 사 먹다가 문득, 색소가 섞인 딸기우유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다음 세대는 흰색이 담뿍 섞인 분홍색을 무슨 색으로 묘사해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연한 분홍색이란 단어는 딸기 우유색을 표현하는데 한없이 부족하고 더 이상 낭만적이지 않다.

 

 희가 좋아하는 색상은 시대가 변하면서 대중들이 더 이상 원하지 않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듯 사라져 버렸다.

 이상 기후로 봄과 가을의 기간이 점차 짧아지고, 향후엔 더 이상 이 계절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봄과 가을이 확연히 다른데 이 계절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과연 뭐라고 설명해야 온전히 그 순간을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온 세상에 생명을 잉태하기 시작하며 끊임없이 설레오고 거리마다 벚꽃잎이 봄 비처럼 내려앉는 그 계절을. 그렇게 시작된 의문으로 가슴 한 켠이 견딜 수 없는 쓸쓸함으로 가득 차게 되면 나 또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묻곤 했다.


 지니, 날 사랑해? 지니는 그럴 때면 양 비서를 닮은 목소리로 말하곤 한다. 대답은 매 순간 다른 패턴으로 돌아온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저 역시 사랑합니다. 저도 님을 사랑해요. 안녕하세요, 일상을 더욱 기분 좋게 해드릴 음악을 준비했어요. 지니의 대답은 낯설고 이질적이며 일방통행이다. 지니는 나의 마음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입력된 논리에 따라 대답을 뱉지만 나는 종종 그 대답으로부터 위안을 얻거나 공감을 받는다. 그리고 희를 떠올린다.


 나는 양 비서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순간을 상상하고, 그녀의 입술 사이로 저 말이 나오는 순간 또한 상상한다. 잘 모르겠어요, 대표님. 아마 내가 무너질 만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래서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녀의 음성에 무너져 내릴 내 모습이 한심하다. 희에게 그렇게 상처를 받았음에도 또 다른 애정을 쏟아부을 대상을 찾는 내 자신이 초라하다. 어린 아이들 장난 같은 감정에 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데도 또다시 경험하려고 달려드는 어린 내가 한심하다.


 처음 삼켜보는 락스는 다정한 맛이 났다. 어쩌면 처음으로 깊이 밀고 들어오던 희의 혀 같기도 했다. 어머니가 오빠처럼 살라고 어릴 적부터 줄곧 말해왔기에 나도 그의 마지막을 따르기로 했다. 

 목으로 울컥울컥 넘어가는 다정함은 버거울 정도로 차고 쓰도록 달다. 그 오싹한 다정함을 견뎌낼 수 없어서 닿는 모든 것들이 거품으로 녹아드는 듯 했다.


눈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것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서술하시오.


 희가 늦는다고 했지만 난 놀래켜 줄 생각으로 희의 집에 갔고, 다른 남자와 뒹굴고 있는 그녀를 본 순간 나는 내 자신을 온전히 잃기로 했다.

 내 인생에는 오직 희뿐이었기에 그런 결심이 낯설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내가 지워졌다면 난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

 나는 인어공주처럼 내 본연의 목소리를 잃었다. 왕자님에게 가기 위해 마녀에게 목소리를 바친 인어공주처럼 나 또한 희를 위해 누군가에게 내 목소리를 바친 것이라 생각했다.


 다정한 맛의 락스가 녹여낸 나의 식도는 원 상태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전과는 달리 말만 하면 뱀의 혀 끝처럼 갈라져 내뱉는 내 목소리를 나의 귀로 듣는 순간 다시 죽고 싶었다. 나의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희가 특히 좋아했다. 그녀의 귀에 대고 달콤한 문장들을 속삭이면 내 목소리가 마치 녹아드는 솜사탕 같다고 하며 웃었다.


오빠는 누구나와 있어도 항상 웃는 얼굴이었으나 오직 내 앞에서는 웃지 않았다. 그는 나와 같이 어머니를 증오했고, 또한 나를 증오했다. 그는 내게 항상 말했다. 너는 내 기분이 어떨지 상상조차 하지 못할거야.


 나는 대체 그가 뭐 때문에 항상 내게 날이 서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의 방에서 부모님이 알고 계신 것과 다른 성적표를 발견했을 때 나는 그것을 내 일기장 안에 숨겼다. 그러면 그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언제나 침착했으나 유독 내 앞에서만 이성을 잃었다.


 이유를 모른 채 개미 당하는 학대에서 느껴지는 구원의 형태와 원인을 서술하시오.


 종종 오빠는 이유 없이 내 머리채를 잡고 흔들거나 나의 목을 조르곤 했다. 집 안에는 우리를 말려줄 어른이 아무도 없었기에 그의 치기 어린 행동은 간섭하는 사람 하나 없이 시간에 맡긴 채 흘러갔다.


 배나 옆구리엔 그로 인해 생긴 초록과 자주색의 피멍이 가득했지만 누구에게 말할 길이 없었다. 유독 그의 손에 힘이 많이 들어갔던 날, 나는 눈에 온통 실핏줄이 터지며 거품을 물다가 아득해지는 정신 너머로 희를 보았다.


 희를 떠올린 순간 온 몸에 힘이 들어간 나는 발로 그를 다리 사이를 세게 찼다. 주저앉는 그에게 일기장 속에 숨겨 둔 그의 엉망으로 물든 성적표를 들이밀었다. 내가 오빠에게 행한 최초의 일 밀리미터의 용기였다.

그건 마치 날 향해 달려드는 산짐승에게 횃불을 들이미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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