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로 그는 내게 손대지 않았다. 차라리 나를 건드리지 않는 그에게 비릿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와 희는 유일하게 내게 소통을 해 주는 이들이었기에, 이윽고 집에서는 그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날 선 외로움으로 또 다른 나를 찢었다. 오빠의 무관심은 결국 나의 자아를 반으로 가른 듯 찢고 그렇게 또다른 나와 대면 했을 때 비로소 날개를 마주했다.
그가 나를 더 이상 건드리지 않자 그가 내 몸에 남긴 흔적들이 옅어지는 대신 반점으로 번지며 봉긋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지만 상처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그것들은 알알히 맺히는 벚꽃잎처럼 혹은 물이 차오르는 사마귀처럼, 물집처럼 부어오르다가 톡톡 터지며 제각기 비늘이 달린 파리한 날개가 되었다. 등에서부터 이어진 날개들은 가슴을 거쳐 배에까지 번졌다.
온 몸에 빼곡히 날개가 돋아오르자 나는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힘을 주면 날개들이 팔랑팔랑 내 시선 앞에서 춤을 췄다. 그것은 징그러우면서도 가냘픈 춤사위였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초라한 기회인 것 같았다.
희 앞에서 내 몸에 이상한 게 생겼다고 옷을 벗어올리는 순간 그 날개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희는 내 말에 웃지 않았고 날개들이 빼곡했던 자리에 일일이 마른 입술로 새로이 흔적을 남겨주었다. 모래알이 닿듯 물기없고 메말랐던 그 흔적들은 새로운 내가 되어 자립하는 것을 오롯하게 도와주었다.
아버지는 온통 땀에 젖은 나를 보고 친정에 들러 씻고 가라고 했지만 나는 집에 계실 어머니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친정집과 불과 차로 5분 거리였지만 그 곳에 들어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아버지는 여러 번 권유하다 체념한 듯한 모습으로 조심히 들어가라고 했다. 상추며 아욱이 자라나면 다시 연락을 줄 테니 가져가라고 했다. 난 어색하게 웃어보이곤 수돗가에서 더러워진 손과 얼굴을 대충 씻고서 차로 향했다.
청소업체 직원이 발견한 속옷을 희에게 집어 던졌을 때 그녀는 반항적인 눈빛으로 나를 쏘아 보았다. 무슨 정신으로 이걸 내 사무실 책상 밑에 둔 거냐고 소리를 지르는 나를 그녀는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사람이 내 속옷으로 착각했을 거 아냐! 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거야!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나를 희는 말리지도 않은 채 한참을 보고 있다가 내가 말을 다 끝내고 나서야 속옷을 주워서 나갔다.
그 때 우리가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는 것을 느꼈다. 이미 오래 전에 모래에 손으로 쓴 사랑해라는 말을 파도가 뭉근히 지워버렸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우리는 파도가 지워버린 흔적을 못 본 척하며 아직 모래사장에 그 글자가 남아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살았다. 누구도 본 적 없는데도.
운전석에 앉자 땀으로 얼룩져 찝찝한 느낌 사이로 톡, 무엇인가가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땀에 온통 젖은 블라우스를 슬쩍 들춰 본다. 비늘이 달린 하늘거리는 은빛 날개 한 쌍이 보인다. 어느덧 반점이 모두 곪아서 여기저기서 날개가 돋고 있다. 날개는 하찮고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듯 연약했지만 이 날개들이 한 번에 퉁, 날개짓을 한다면 내 몸 하나는 충분히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았다.
어쩌면 오빠도 그 날 죽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날아오르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내 몸에 손을 댈 때마다 오빠의 몸에도 이 하늘거리는 날개들이 하나씩 돋아났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끊임없이 내게 손을 댔고 날개가 수도 없이 많이 생겨나자 이 참에 세상을 한번 날아보고자 대교 위에서 호기롭게 몸을 던진 것이 아닐까.
그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마주한 그의 모습은 무표정했고, 동공에는 초점이 없었다. 예전처럼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닿는 것을 기대하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내가 집을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도 나가지 않았을 것만 같다. 결국 그를 다른 생으로 내몬 자는 부모가 아닌 내 자신이었다.
그의 다정한 날개는 온통 죽을 자로다.
'죽은 새를 날다'.
희가 처음으로 써서 내게 선물해 준 소설의 제목이었다. 죽은 새가 어떻게 날아? 나는 코웃음을 쳤지만 그 문법도 통하지 않는 제목의 글은 글자 하나하나가 반짝반짝 빛났다. 문체는 담담했고 눈에 담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을 위로로써 보살펴 주는 듯 했다.
내가 받아 본 생일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이었고 나는 외롭고 쓸쓸할 때마다 혹은 그녀의 마음이 도무지 잡히지 않을 때마다 그 글을 읽고 또 읽었다. 음성으로 소리내어 읊는 단어들은 비눗방울처럼 오색 빛이 되어 혀 끝에서 톡톡 터졌다. 터지는 방울마다 달큰하고 항긋한 딸기 우유 향이 났다. 나는 희가 무척 그리우면서도 지겨웠다. 번뇌의 알고리즘을 이 쯤에서 끊어내고 싶었다.
홀로 외로움과 싸우고 있던 내게 성큼 다가왔던 희, 다른 남자와 뒹굴던 희, 내 날개가 있던 흔적을 입술로 지워주던 희, 자신의 속옷을 내 책상 아래에 숨긴 희, 사랑한다고 단 한번도 말해주지 않던 나의 희.
차에 앉은 채로 핸드폰을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결심을 하고 연락처를 검색했다. 핸드폰 액정에 땀과 물이 범벅된 지문이 온통 찍힌다. 블루투스를 통해 연결되는 신호음이 더없이 차갑다. 정확히 세 번 신호가 간 후 상대방이 전화를 받는다.
네, 대표님. 양시아입니다, 라고 말하는 양 비서의 목소리가 여느 때처럼 예의바르고 달다.
주말이다. 업무 외적으로 양 비서에게 전화를 거는 것은 처음이다. 나는 철저하게 평일 업무시간에만 그녀와 연락을 했다. 내가 말이 없자 그녀도 침묵을 지킨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닮은 그녀는 내가 말을 걸기 전 먼저 감히 내게 말을 거는 법이 없다.
오랜 침묵을 깬 것은 역시나 나였고, 나는 너무도 재미 없이 뭘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정말 진부하고 지루한 질문이었으나 그녀에게 물을 말이 그것 외에는 없었다. 그녀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처럼 정해져 있는 답을 내게 건낼 것이다. TV를 보고 있어요, 낮잠을 잤어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아요 등의 산발적이고 상투적인 답변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니와 달리 예정되지 않은 답을 했다.
"같이 영화라도 보러 가실까요?"
나는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었다. 내 온 몸에 돋힌 날개들이 일제히 팔락, 날개짓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땀에 젖은 힘없는 날개들의 크기가 갑자기 커지는 것을 느낀다. 이 정도의 크기의 날개라면 차를 두고 그대로 그녀에게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수화기 너머로 그녀가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웃음소리 또한 상냥하고 달다. 수화기 너머에서 문득 딸기 우유향이 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녀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기다리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일방통행으로 나와 소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핸들에 손을 얹었다가 기어에 손을 얹었다가, 초조하면서도 온통 설레는 기분으로 도무지 마음을 종잡지 못한 채 다리를 떨었다.
다리의 진동에 맞춰 날개들도 하나의 떨림을 이어간다. 몸에 돋아난 수많은 날개들이 떨리는 것은 간지럽고 소름돋는 일이었지만, 그녀의 앞에서 옷을 벗으면 이 많은 날개가 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을 안다. 나는 결심한 듯 목적지를 입력하고 차를 출발한다.
일단 몸에 엉겨붙은 흙먼지와 땀을 씻어낸 후 다시 그녀에게 전화할 것이다. 바다를 닮은 양 비서는 동화 속에 나오는 지니처럼 나의 모든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오직 나의 음성을 넣은 명령에 복종하며 내가 원하는 바를 모두 추구해 줄 것이다. 잡았다 싶으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던 희와 달리 그녀가 내게 다가와 줄 것을 안다. 나보다 용기있고 나를 잘 읽어내는 그녀의 만남이 새로운 날갯짓으로 다가올 것을 안다. 영화를 보고, 같이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옅은 욕망을 담아낸 그녀의 시선을 이번에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입술이 온통 내 몸을 뒤덮은 날개들을 재워주도록 온 정신을 바다에게 맡길 것이다.
코를 막고 하나 둘 셋, 구호에 맞춰 호흡기를 물고 배에서 뛰어내리면 바다는 언제든 날 깊이 맞이해 주었다. 자신을 깊이 탐미하는 것을 단 한번도 막아선 적이 없었다. 나는 BCD와 호흡기를 맨 채 양 비서에게 뛰어들기 전 산소통 200BAR가 가득 차있는지 확인한다. 내게 허락된 시간 내 난 결코 먼저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산소가 50BAR 이하로 떨어지더라도 양 비서의 내면에서 잠수하며 그녀를 탐험할 것이다. 다이빙 마스터 없이 홀로 그녀를 탐험하도록 깊은 그녀는 나를 리드해 줄 것이다. 내가 심해의 노도에 휩쓸려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