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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a Apr 08. 2021

주사를 놓는 자리

 방금 전까지 음식이 있던 자리가 얼마나 따뜻했던지, 유리에 물기가 서려 있더군요.


거울을 보니 된장국물이 묻은 PK티에 푸석한 퍼머 머리를 한 여성이 공허한 표정으로 있었습니다.

화장품조차 찍어 바르지 않은 제 이런 모습을 당신이 봤다면 어땠을지. 얼마나 진저리 쳤을지 생각하니 끔찍해졌지요.

옷장으로 가 문을 활짝 열어 제쳐 보았습니다. 색상 별로 각을 맞춰 즐비하게 걸어놓은 당신의 옷들과 달리 저의 옷은 다 합쳐서 열 벌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 길로 집을 뛰쳐나와 택시를 타고, 집에서 거리가 좀 있는 아울렛 매장으로 향했습니다. 그 아울렛은 신혼 초 당신과 몇 번 거닐다가 제가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자, 같이 가는 일이 없었지요.

사실 그 후로도 몇 번 당신 혼자서 아울렛에 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녀와 함께 아울렛 매장들을 거닐고 옷들을 걸쳐 보았겠지요. 당신의 팔짱을 낀 산수유 빛의 그녀가 당신에게 이 옷, 저 옷들을 목 밑으로 대어 주며, 가장 잘 어울리도록 코디를 해 주었겠지요.


오랜만에 방문한 아울렛은 브랜드별로 매장이 어지럽도록 늘어서 있었고, 점원들은 자본주의적 미소를 띄고 절 맞이했습니다.

어떤 옷을 사야할 지 몰라서 무턱대고 여성복 매장을 하나하나 들어가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매장에 들어가 보면 볼수록 점점 현기증이 나고 구토가 치밀더군요. 매장 안에서 나는 그 특유의 냄새도 질식할 것 처럼 진저리가 났고, 점원들의 로봇 같은 표정과 미소도 지긋지긋했습니다.

최신 유행한다는 원피스며 블라우스들도 전부 꼴보기 싫어졌고, 다 그 옷이 그 옷처럼 보였습니다.


눈 앞이 빙빙 돌고 자꾸 혀 밑에 단 침이 고였습니다. 헛구역질이 치밀어 오르고 가슴이 답답하며 위산이 역류하듯 목에서 쓰고 신 맛이 일었습니다.

결국 저는, 집에 있는 것 보다 색이 조금 더 하얀 PK티를 한 장 간신히 사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 안에선 아침에 치우지 않고 나간 된장 냄새가 쿰쿰히 나고 있었지요. 바닥에 나뒹굴던 시래기 줄기며 유리조각을 하나하나 손으로 집어서 치웠습니다. 바닥에 된장국물이 배어날까봐 걸레로 계속 바닥을 훔쳐내다 자꾸 눈에 고이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어서 조금 울었습니다.


당신은 그 날 서류가 없어서 주간 업무보고 회의를 망쳤다고 했지만 글쎄요, 정말로 회의가 있었는지 조차 모를 일이지요.


그 후로 꽤 오랫동안 음식을 하려 하면 당신이 햄버거를 먹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 햄버거가 제가 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제 몸을 송두리째 갈아 넣어 햄버거 안 패티가 되는 꿈을 몇 번쯤 꾸었지요. 저의 곱게 갈린 몸을 빵과 빵 사이에 두고 한 입 맛있게 베어 물려던 당신의 입 안 붉은 혀와 움틀대는 목젖을 보며 꿈에서 깨어났지요. 꿈에서 깰 때마다 항상 당신은 제 곁에 없었습니다. 서늘한 기운이 드는 빈자리만 존재했지요.


주사기를 들고 있는 제 손이 떨리네요. 인터넷 속 익명의 판매자에서 많은 돈을 주고 건네 받은 마취약은 외과수술을 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발가락 혈관을 찾아서 주입시키면 된다 하였습니다.

마취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인터넷을 뒤져보았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뿐이더군요. 발가락을 온전히 잘라내려면 전신마취나 부분마취가 필요하고, 그러기엔 제가 혼자서 절대 할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발가락을 자르러 왔습니다, 하고 병원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그랬다가는 경찰이나 정신병원에 신고라도 당할 것 같았어요.


어렸을 때 저는 주사 하나도 제대로 못 맞는 겁쟁이였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말한 적이 있지요? 전 멀리서 주사바늘만 봐도 자지러지게 울곤 했다고요.

부모님은 그런 저를 열심히 어르고 달랬고, 간호사는 다소 귀찮은 표정으로 얼룰루, 까꿍 하며 형식적인 목소리로 주사를 놓곤 했지요.

그랬던 제가 지금 당신을 위한 이 하찮은 감정 하나만으로도 용기 있게 주사바늘을 들고 있다니. 이건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입니다. 제가 당신을 정말 많이 사랑하긴 하나 봅니다.


차라리 홍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하고 직접 마취주사를 놓아달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이야기를 들으며 홍이 그 맑고 쌍꺼풀이 깊게 진 커다란 눈으로 흐느껴 울 것을 생각하니 썩 유쾌하지는 않네요. 홍은 울 때가 가장 예쁘지만, 그래도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홍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해도 그녀가 마취주사를 놓아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네요. 그녀가 저를 위해 손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길고 가녀린 손은 이미 어디에선가 새파란 잎으로 새로 자라날 준비를 할텐데 말이지요.

아, 그 새카만 홍의 눈동자라니. 그녀와 눈을 맞추면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칠흑같은 그 눈동자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지곤 했지요. 눈을 맞출 때 제게 닿는 끝없는 안정감과 평온함이란.


잠시 간호조무사를 준비했던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몇 개월 짧게 준비해본 것일 뿐 시험에 합격한 것은 아닙니다. 그거라도 땄더라면 좋았을까요?

노란 고무줄로 발 가운데에서 좀 더 위쪽 부분을 여러 겹 묶어봅니다. 곧 피가 통하지 않는 게 느껴지고, 발 끝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자 피가 확 몰리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 도저히 못하겠는데요.

느닷없이 홍의 붉은빛 입술이 생각납니다. 이제서야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네요. 발가락 쪽으로 타고 올라가는 튀어나온 푸른 혈관 하나에 쿡, 깊이 바늘 끝부분을 밀어 넣어봅니다. 제대로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손은 계속해서 덜덜 떨립니다. 제가 이런 담대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니요. 조심조심 주사기를 밀어 마취용액을 투입시킵니다. 이런 협소한 지식으로 과연 제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싶습니다.  


전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감이 부족해지곤 했지요.

중요한 일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나, 저의 의지로 무엇인가를 이뤄내야 할 때에는 끊임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특히 당신 앞에서는 전 항상 주눅이 들고, 온 몸이 자격지심에 가득 차는 게 느껴집니다.

왜 그리도 당신 앞에서면 자신이 없어질까요. 왜 그리도 당신은 제게 두렵고도 큰 존재일까요. 왜 그렇게 두렵지만 한없이 사랑스러운 당신일까요.


전 항상 모든 상황에서 당신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했습니다. 혹시 기억하고 있나요, 당신?

당신을 처음 만나던 날은, 외삼촌이 주선해 준 세 번째 선자리에서였습니다. 한 유명한 파인 다이닝에서 저녁식사 예약을 한 당신은 키가 훤칠했고, 눈매가 시원했습니다. 저를 보자 반갑다며 활짝 웃었지요. 그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저를 잠시 멈칫하게 했습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그 때에 당신을 보며 전 잠시 홍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의 입꼬리 끝에서 홍의 붉은 입술이 자꾸 떠올라 고개를 절절 내저었지요. 당신의 시원한 눈매 속 잠식된 홍의 까만 눈동자가 자꾸만 보였지요. 당신의 턱 선을 타고 올라가 둥그렇게 이어지는 귓바퀴 끝 곡선에서 홍의 목선이 자꾸 겹쳐졌지요.

저의 상태를 걱정하는 당신에게 머리가 좀 아파서요,하고 억지로 웃어 보였습니다. 당신은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이런, 잠시만 실례할게요, 라며 급히 레스토랑을 나가 근처 약국에서 두통약을 구해 왔습니다. 그 일이 소소한 감동을 주었죠. 홍의 한 부분을 떠올리게 도와주는 당신에게도 호감이 생겼습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당신은 저보다 친정의 재산에 더 흥미가 있었습니다. 애초부터 전 당신의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실을 조금 더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이미 제가 당신을 너무 사랑하게 된 후에 깨달아서 많이 아팠습니다.


발가락을 만져봅니다. 오, 마취가 잘 되었나 봅니다. 감각이 없습니다. 제 몸에 매달려 있는 고무장갑을 만지는 느낌입니다. 이리저리 쿡쿡 찔러보아도 여전히 무신경합니다. 저와 잠자리를 하는 당신의 입장이 이랬을까요? 흐늘흐늘 힘없이 늘어지는 당신의 성기가 떠오릅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한 번 가라앉으면 도저히 세울 수가 없더군요.


유난히 당신은 저와 변기 위에서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전 변기를 보면 자연스럽게 배설이 연상이 되어서 성욕이 뚝 떨어지곤 했지요. 변기 위에서 이런 일을 하다니 정말 남사스럽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저의 인위적인 신음소리는 벽에 부딪혀 더 크게 울렸고 그때마다 전 수치심에 어쩔 줄 몰랐지요.

당신이 아무리 절 만지고 더듬어도 자꾸 변기와 연상되는 그 더러운 배설들 때문에 한참 동안 젖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젖지 않아 당신이 제게 짜증을 쏟아낼 때쯤이면 억지로 홍의 곧게 뻗은 긴 다리와 가냘픈 허리를 떠올리곤 했는데, 그럼 그제서야 아랫배가 뻐근해지는 통증과 더불어 겨우겨우 젖어들곤 했습니다.

그런 더러운 자리에서, 하필 변기 위에서 나의 순수하고 깨끗한 홍을 상상하는 것이, 홍에게 어찌나 미안하고 죄스러웠던지요.

하지만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홍과 저는 이제 당신의 안에서 영원히 함께일 테니까요.


어느 날부턴가 저의 회음부 쪽이 유난히 따갑고 간지러워 병원을 찾았습니다. 단순 질염을 진단받아 처방된 약을 먹었으나 도무지 낫지 않더군요.

세 번째 찾아갔을 때 의사는 제게 STD 검사를 권했고, 클라미디아라는 균이 나왔습니다.

결혼 하신거면 남편 분도 동일한 약을 복용해야 병이 나아요,라고 사무적으로 말하는 의사에게 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혹시 공공장소에서 이 병이 옮았을 가능성이 있나요? 라고 물었지요.

의사는 담담하게 아니요, 오로지 성행위로만 걸리는 병입니다. 성병이니까요. 라고 답했습니다.


맥이 풀리고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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