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보는 의사의 표정은 그래, 대부분의 여자들은 너처럼 남편을 믿고 싶어하지, 하는 비웃는 듯하면서도 어느 정도 측은함에 휩싸인 표정이었지요.
남성들이 가끔 회식자리에서 룸싸롱이나 안마방 같은 접대공간에 간다는 이야기를 저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병을 옮겨 온 걸까요?
굳이 비정상적인 공간에서 관계를 가지려고 하는 당신의 집착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아닐 것이라고 믿었던 제 자신이 측은해졌습니다. 아무리 회식을 마치고 늦게 귀가해도 그냥 그 시간까지 술을 마셨겠거니 했는데 이 얼마나 미련한 믿음인지요.
그 후로는 더욱 당신과 관계를 가질 때 젖지 않았고, 관계 도중 홍을 떠올리는 횟수가 늘어났습니다.
당신은 저와 잠자리를 할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어떤 기분으로 저를 안으려고 했을까요?
부부간의 합당한 사랑으로서가 아닌 좀 더 의무적인 기분으로 한 것일까요, 또는 화대를 챙겨주지 않아도 되는 욕정을 푸는 기구같은 정도일 뿐이었을까요?
혹시 제가 홍을 떠올렸듯 당신도 저와 밤을 보낼 때 당신의 그녀를 상상했나요?
당신의 그녀와 관계를 할 때에도 변기 위에서 하려고 할까요?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이 없으니 영원히 모를 일입니다.
메스를 집어 들었습니다. 발가락에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집니다.
아까 마취 주사를 놓을 때 손을 덜덜 떨었던 것과 달리 메스를 잡자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습니다.
네 번째 발가락을 집어올려 메스를 바짝 갖다 댑니다.
제가 지금 메스를 들이대는 것이 제 발가락이 아니라 당신의 목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목젖이 울컥대고 혈관이 쿵쿵 소리를 대며 뛰는 대동맥에 이 메스를 바짝 밀어넣고 당신의 뜨거운 숨결을 바로 옆에서 관찰한다면 얼마나 흥분될까요.
당신이 살려달라며 제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비빈다면 얼마나 짜릿할까요. 당신의 목숨을 제가 쥐고 흔들 수 있다면 얼마나 통쾌할까요.
그런다면 제가 당신에게 품고 있는 이 지독한 사랑이라는 감정도 조금이나마 만족감으로 녹아 내릴 것 같습니다.
어설프게 알고 있는 지식대로 거즈와 솜을 잔뜩 발가락 밑에 놓아둡니다.
자, 이제 정말로 발가락을 잘라낼 순간입니다. 당신에 대한 저의 모든 미련을 잘라낼 시간입니다.
메스를 천천히 밀어 넣습니다.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습니다. 메스 날을 이리저리 움직일 때 마다 울컥 울컥 치솟는 피로 솜이 저의 시선보다 더 빠르게 젖어들어 겁이 납니다.
이러다가 빈혈로 기절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발가락을 자르고 있는데도 원래부터 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굉장히 낯서네요.
뼈와 뼈 사이의 연골을 찾아 이리저리 메스날을 돌려봅니다. 준비해둔 솜은 이미 모두 젖어버린 채 솜 밑으로 핏물이 빠르게 배어나오며 바닥으로 온통 번집니다. 저 핏물의 흐름이 또 하나의 아름다움을 시사하네요.
저 피가 저의 것이 아니라고 계속 세뇌시켜 봅니다.
잠시 어지럽고 구토가 치밀었지만 다행히 그 예전에 아울렛에서 옷을 고를 때만큼은 아닙니다.
간간히 손에 힘이 빠지지만 그 때마다 홍을 떠올립니다. 항상 홍을 떠올리면 손 끝에 힘이 들어갑니다.
당신이 지난 날, 이혼을 요구하며 제 목을 졸랐을 때도 손에 힘이 잘 들어갔나요?
혹시 당신도 그 때 절 보고 있었지만 조르는 손에 자꾸 힘이 빠져, 속으로 다른 이를 떠올리며 제 목을 졸랐나요?
당신은 그 때 누구를 상상하여 제 목을 졸랐을까요?
지금 제가, 발가락을 자르고 있지만 그 사실을 외면하며 홍을 떠올리고 있듯이 말이죠.
마침내 이 고통없이 고통스러운 시간이 끝났습니다. 완전히 잘려진 발가락을 준비한 얼음물에 담급니다.
이상하게 속이 후련하네요. 전 제가 발가락을 스스로 잘라내면 어떤 기분일까 오랫동안 상상했습니다.
섭섭함에 눈물이라도 흘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앓던 암세포를 잘라낸 것처럼 속이 시원합니다.
손가락으로 얼음물에 담긴 소중한 제 발가락을 건드려봅니다. 방금 전까지 저와 한 몸으로 엉켜 있었는데, 마치 타인의 것처럼 낯선 느낌입니다. 하지만 이 발가락도 또 다른 제가 맞습니다. 당신이 삼키게 될 저의 이데아 말입니다.
지혈을 시작하며 처음으로 당신의 그녀를 만나던 날을 떠올립니다.
그 날은 무척 더웠고 가만히 있어도 불쾌지수가 올라가는 날이었습니다.
당신의 저녁메뉴를 고민하고 있는데, 핸드폰에 처음 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제게 전화를 걸만한 사람은 홍 외에는 없습니다. 이상했지요.
여보세요, 전화를 받았지만 상대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번 연속으로 전화를 끊었고, 세 번째에 비로소 저기여, 라며 앳된 목소리로 말을 걸었습니다.
"저기여, 혹시 민호씨 아내분 되시나요? 제가 지금 민호씨랑 사귀고 있는데요. 좀 뵙고 싶어서요."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요와 여의 중간쯤 발음으로 말을 끝맺으며 젊음을 과시했습니다.
그 상큼하고 발랄하게 통통 튀는 목소리라니요.
한 카페로 날 불러낸 그녀는 긴 생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며 컵 밖에 물기가 송글송글 맺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았습니다. 저는 그 더운 날 유자차를 시켰지만 한 모금도 넘길 수 없었지요. 제 모든 신경과 관심이 온통 시어질 듯 아름다운 그녀에게로 쏠려 있었으니까요.
그녀의 붉은 입술을 보며 저 도톰한 입술로 당신의 성기를 저렇게 커피 마시듯이 빨아 주었을까,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한참 커피를 빨더니 눈을 치켜올리며 제게 새된 목소리로 물었지요.
"오빠한테 얘기 들었는데 둘이 막 죽도록 사랑하진 않는다면서요?"
당돌하게 말을 꺼내는 그녀를 보며 전 속으로 홍 생각을 했습니다. 이 순간 그녀가 몹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자리를 그대로 박차고 나가 홍에게로 달려가서 그녀의 달큼한 향이 연하게 피어 올라오는 목덜미에 잔뜩 고개를 묻고 짐승처럼 이빨을 콱 박은 채 거칠게 빨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근데 저는 오빠 없이는 못 살겠더라구요. 이혼이라도 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스스럼없이 제 앞에서 당신에게 오빠라고 지칭하는 그녀를 보며 지난 날 홍이 해준 인어공주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인어공주는 바다에 빠진 왕자님을 살려내지. 그런데 정신을 차린 왕자님은 길을 가던 이웃나라 공주님을 보고 공주님이 자신을 살렸다고 생각해서 그녀와 사랑에 빠져. 결국 인어공주는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물거품이 되어버리지. 넌 이 중에서 누가 가장 가엾어?"
홍은 제게 묻고, 미처 제가 대답할 틈도 없이 스스로 답했습니다.
"난 마녀가 가장 가엾어. 아마 마녀는 인어공주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을 거야.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짝사랑 말이야. 아무리 해도 닿을 수가 없어서 자신이 사랑하는 인어공주의 목소리와, 머리카락이라도 챙겨간 그 마녀 말이야. 넌 마녀가 인어공주를 사랑했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니?"
전 고개를 반짝 들었습니다. 저를 애달프게 바라보는 홍과 뜨거운 시선이 뒤엉킬 듯이 마주쳤습니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을 부딪혔습니다. 홍의 가녀린 허리와 어깨를 두 팔로 거칠게 끌어안으며 머릿속이 아득해짐을 느꼈습니다. 홍의 혀는 달고 깊었습니다. 치아는 매끈했고 입술이 말캉해서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영원히 이렇게 홍을 끌어안고 싶었습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홍의 몸이 떠오릅니다.
"저기요? 이혼이라도 해주셨으면 좋겠다고요."
그녀는 예쁜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당돌하게 내게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 관리를 잘 하셨어야죠, 하고 새침하게 쳐올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흩날리는 유리조각이 되어 제 귀에 알알히 박혔습니다. 그런 대사는 삼류 소설에나 나올법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만나 시시한 말다툼 끝에 별거에 들어갔지요. 그 때 당신이 힘껏 목을 조른 탓에 제 두 눈에는 실핏줄이 모두 터졌고, 목에는 당신의 손톱자국이 깊게 남았습니다. 홍이 제 목에 난 상처를 보고 얼마나 심하게 울던지, 마음이 너무나도 아파 처음으로 당신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죽여서 영원히 소유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방법이 더 당신에게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홍과 당신을 모두 사랑하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전 집착이 심했습니다.
한 번 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두고두고 저의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질려도 절대 동생들에게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명절 때 다같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동생에게 장난감을 양보하지 않았다고 어머니께 등짝을 맞아도 엉엉 울며 손에서 장난감을 놓지 않았습니다.
전 그런 사람입니다. 당신이 절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 당신을 저의 남편으로써 소유할 것을 모두의 앞에서 공식적으로 약속했고, 저는 제가 한 번이라도 소유했던 것들은 절대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당신을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당신의 몸 속으로 들어가서라도 당신의 남은 삶을 소유하며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 전 당신을 위해서 저의 발가락을 잘라냈지요.
당신은 태어났을 때부터 발가락 하나가 없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어렸을 때 사고로 잃었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당신은 발가락 하나를 받지 못했습니다.
친척들은 당신의 어머니가 불러온 죗값이라고 수근댔다지요.
그 옛날, 당신의 어머니는 임신한 아내가 있는 남자를 꼬여내어 살림을 차렸고 그 충격으로 본처는 유산을 했다지요.
뱃속에서 빛도 못 보고 죽은 아가가 사무치는 억울함에 당신의 발가락 하나를 가져간 것이라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수군거렸다지요.
이 모든 이야기는 끝내 그 남자에게 버림받은 당신의 어머니가 술을 마시고 취할 때마다 당신을 때리며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온 비명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당신이 그런 식성을 가지게 된 것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