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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na Apr 08. 2021

당신과 나의 거리

오늘은 하나뿐인 당신을 위해 저의 네 번째 발가락을 잘라내는 날입니다.


지혈도구를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아는 사람을 통해 어렵게 구해낸 수술용 메스는 이미 몇 번이나 닦아내어 제 얼굴이 비칠 지경입니다.

소독한 거즈로 다시 한 번 닦아낼까 생각하다가 그만둡니다. 어차피 전부, 부질없는 짓이겠지요.

메스가 놓여진 화장대에는 언젠가 우리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며 당신이 사다 준 진주목걸이가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습니다.

여음새의 고리가 고장이 나 A/S를 맡기려고 생각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저는 아직 목걸이를 구입한 곳에 연락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까무잡잡한 내 피부에 진주목걸이는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촌스러움을 부각시킬 뿐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처음부터 제가 아닌, 당신의 그녀를 떠올리며 목걸이를 골랐을지도 모르지요.


당신의 외도를 처음으로 알았을 때 화가 난다기보단 그래, 그럴 수 있다는, 감정이 배제된 이해심이 들었습니다. 크게 화가 나진 않았습니다. 모든 이유를 제 탓으로 돌리는 당신의 모습에서도, 그리고 당돌하게 말을 섞어오는 긴 생머리의 앳된 당신의 그녀에게도 말입니다.

그저 저의 것인 당신을 타인이 감히 공유했다는 사실이 불편했을 뿐입니다.


당신의 그녀는 묘하게 시선을 잡아 끄는 얼굴입니다. 눈망울이 까맣고 조금 처져 있으며 입술이 도톰한 것이 꼭 늦은 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말갛게 피어 올라오는 붉은 산수유를 닮았지요. 입에 담으면 새콤한 향기가 짙게 피어오르는 그 산수유처럼,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당기면 꼭 그런 맛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잘 관리된 피부가 반질반질 윤이 나서 저도 손 끝으로 한 번쯤 그 도자기 같은 것을 쓰다듬어 보고 싶었지요.


그녀의 긴 목 아래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가슴과 허리의 윤곽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눈썹 위로 조금 올라오는 기장의 앞머리는 그녀의 나이를 더욱 어리도록 가늠하게 해 주더군요. 그래서일까요? 당신의 그녀에게서 홍의 모습이 겹쳤습니다. 감히 말이죠.


홍 역시 처음 만났을 때도 한눈에 이 여자가 정말 아름답구나, 하는 인상을 주었으니까 말입니다.

단정하게 머리를 높이 묶어 올릴 때 비치는 그 하얗고 뽀얀 홍의 목덜미라니.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홍의 붉은빛 입술과 나직하게 제 귓가에 내려앉는 조금 젖어있는 목소리. 길게 뻗은 그녀의 하얀 손가락으로 제 뺨을 쓸어내릴 때, 저절로 가빠지는 저의 호흡. 그러다가 짙게 엉키는 홍과 저의 시선이란.

저의 홍은 정말로 수려하고, 우아합니다.

홍을 떠올리자 유두가 바짝 일어서며 아랫배가 욱신하니 뻐근해지네요. 어느 새 입안 가득 달달한 침이 고입니다.


당신은 결혼하기 전부터 저의 함몰유두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요.

서로의 몸을 탐할 때, 상대방의 흥분 정도를 유두의 발기상태로 짐작한다고 했던 당신. 당신은 아무리 애무해도 봉긋하게 솟아오르지 않는 저의 유두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빨아주면 뭐해, 당신은 한창 애무에 집중하다가도 짜증 섞인 목소리를 던지곤 했지요. 난 솔직히 지금 네가 느끼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만족은 하는 거야?


유난히 작은 성기를 가진 당신은 상대방의 쾌감 정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 그런 질문들이 민망하고 낯뜨거워서 번번히 대답을 피하곤 했습니다.


저의 유두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본인 상태가 그런 것 인지, 당신은 저와 관계를 가질 때 여러 차례 풀이 죽는 성기 때문에 제게 성질을 내거나 힘들어했지요.

어떻게 하면 당신이 저와의 부부관계에 만족할 수 있을지 고민하여 인위적인 신음소리를 내어본 적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내뱉는 저의 신음소리는 듣기에 너무 천박했고, 민망했기 때문이지요.

아직도 기억합니다. 초등학생 때 담임 선생님이 순결캔디라고 이름이 붙여진 사탕을 나눠주며 순결서약서에 서명을 강요했던 그 시절을요.

어렸을 때부터 정숙한 숙녀의 지침을 강요하는 교육을 받아온 저로써는 당신과의 잠자리가 정말 버거웠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그녀에게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든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요.


다만 그녀에게, 그녀와의 잠자리에서는 당신의 발기가 문제 없이 지속되는지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은 것은 제 마지막 자존심이었습니다. 순수한 호기심을 넘어 악에 받친 치기였는지도요.


당신은 한 케이블 방송국의 PD입니다. 하지만 저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릅니다. 친구들은 호들갑을 떨며 당신을 통해 연예인을 많이 볼 수 있겠다고 하였지만 전 도통 그 쪽 세계에 관심이 없습니다. TV를 보아도 항상 보는 프로그램만 볼 뿐입니다. 전 새롭고 낯선 것을 경계하고 어려워 하니까요. 어린 친구들조차 줄줄 외우는 연예인 이름들을 전 도무지 외울 수가 없습니다. 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 보였지요.


TV속 연예인들은 하나같이 어느 정도 곱고, 몸매가 좋고, 말도 정말 재치있고 조리있게 잘 했습니다. 저와는 달리 말이죠.

저는 어떻게 해야 그렇게 상대방을 휘어잡는 화술을 쓰는지 모르겠고, 외모를 가꾸는 일 보다는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매일 아침 일찍 나가는 당신을 위해 아침밥을 차리고, 저녁 늦게 귀가한 당신을 위해 간단한 요기거리를 식탁 위에 차린 채 잠드는 게 저의 주요 일과였습니다. 당신은 매번 밥상에 거의 손도 대지 않았으나 전 당신이 남긴 식은 밥을 다시 데워먹으며 그렇게 지냈지요.


결혼한 지 수 년이 지났지만 당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게 된 건 불과 몇 달 전입니다.


처음부터 당신이 솔직하게 좋아하는 음식이 따로 있다고 하면 전 응당 그 음식을 구해왔을 거예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왔겠지요. 어쩌면 제가 당신을 소름 끼쳐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식성을 애써 감췄겠지만, 전 지금도 당신을 위해 제 몸 한 부분을 잘라낼 생각까지 하고 있는걸요.


당신은 제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그리고 갖고 싶어서 집착하는지 짐작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 언제나 비슷한 음식만을 식탁에 올렸습니다. 친정에서 직접 담근 조선간장을 얻어와 정성스레 조린 꽈리고추나, 견과류를 듬뿍 넣고 달달 볶은 멸치볶음을 입에도 대지 않는 당신이지만 언제나 비슷한 반찬을 반복적으로 만들어 식탁 위에 올렸습니다.

전 원래 변화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여름이면 기본 PK티를 여러 장 사서 돌려 입고, 겨울이면 목까지 모두 덮어 올라오는 폴라티를 여러 장 사곤 했지요. 항상 베이지색 또는 검은색 면바지를 입으며, 그렇게 패션엔 도통 관심을 갖지 못했지요.

다른 사람들이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할 때, 전 그런 것들과는 멀찍하게 거리를 두고 지켜보았습니다.

당신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트렌드에 민감했지요. 어쩌면 당신의 직업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옷장에는 항상 제 옷보다 당신의 옷이 더 많았고, 철마다 시즌별로 다른 상품이 택배로 집에 도착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똑같은 집 인테리어 또한 못 견뎌 했습니다. 저와 우리 집은 언제나 그렇듯 변함이 없었죠.

너는 대체 집에서 뭘 하는 거야? 하다 못해 계절마다 벽지 색이나 가구 위치라도 바꿀 수 있는 거잖아, 라고 말하는 당신을 전 도무지 이해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언제나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저와 결혼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아무리 처음부터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다고 하지만, 당신은 의외로 더 저와의 생활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취향에 맞는 그녀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에게 위로를 받았을 지도요.


언젠가 당신이 회의에 필요하다는 서류를 두고 출근한 적이 있었지요. 당신이 전화를 받지 않아 전 무턱대고 회사 근처로 찾아갔습니다. 그 서류가 당신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당신이 전날 밤 침대로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해서 밤새 회의 자료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지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뛰는 듯이 걸으며 그렇게 찾아갔지요. 평소에 운동을 하지 않아 옆구리가 결렸지만, 헉헉 숨을 몰아 쉬며 빨리 내달았습니다. 곧 목 깊은 곳에서 쇠 맛이 나기 시작했지만요,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지요.


회사로 들어가는 가로수 길에 위치한 24시간 운영하는 패스트푸드점 창가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햄버거를 베어 무는 당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득 아침에 당신이 손도 대지 않은 시래기 된장국과 애호박볶음이 떠올랐지요.

그 음식들을 만드느라 전 그 날 새벽같이 일어났고, 찬물에 애호박을 씻고 시래기를 다듬었습니다. 애호박으로 전을 할까 볶음을 할까, 고심하다가 새우젓을 넣고 간간하게 볶았지요.

친정에서 얻어온 귀한 집된장을 가지고 시래기를 듬뿍 넣어 그렇게 된장국을 끓여냈지요.

시래기는 당신을 먹이려고 겨우 내내 베란다에서 정성스레 말린 것이었습니다.

도마에 애호박을 썰며 통통 소리가 날 때 침대 위 당신이 뒤척이는 기척이 느껴지면 가만히 칼질을 멈추고, 당신이 깨지 않도록 좀 더 숨죽여서 요리를 이어가며 그렇게 만들었던 음식들이죠.


시판 된장은 맛이 없어야, 그런 걸로 아무리 국을 끓여 봤자 시중에 파는 건 집 된장 맛을 절대 못 따라오는거라. 어머니의 말씀처럼 저는 집 된장을 고집하여 두부를 슴슴 썰어넣고 된장국을 끓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침 내내 제가 어떤 음식을 만드는지 도통 관심이 없었지요.

계속해서 일어나라는 저의 말을 무시한 채 자던 당신은 눈을 뜨자마자 옷을 챙겨 입었습니다. 한 술만 뜨고 출근하라는 저의 애타는 말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회의가 있다며 당신은 서둘러 준비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전 당신이 정신 없이 준비하느라 서류를 빠뜨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성격이 꼼꼼한 당신이 그럴 리가 없었는데 말이죠.

아침 일찍부터 회의가 있어서 급히 나가봐야 한다던 당신은 그렇게 회사 근처 햄버거 집에서 여유롭게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지요. 당신의 모습을 보다가 전 오른손에 서류를 든 채로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멀어서, 아무리 걸어도 도통 집에 닿질 않았습니다.

갈 땐 나는 듯이 뛰느라 한 손으로 옆구리를 움켜 쥐며 뛰어갔는데도, 돌아갈 땐 발을 질질 끌며 걸었습니다.

발 끝에 애처롭게 매달린 그림자만 제 눈치를 살필 뿐이었지요.


집에 와보니 식탁 위에 제가 차려놓고 미처 치우지 못한 애호박볶음과 시래기 된장국이 온기를 풍기며 놓여져 있었습니다. 음식들을 보자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목 깊은 곳으로부터 울컥 솟아올랐습니다.

전 음식이 담긴 그릇들을 식탁 밑으로 확 밀어버렸고 음식과 그릇은 소리를 내며 뒤엉켜 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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