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희의 마음과도 같다.
희의 마음은 제자리에 둔 것이 확실한데도 자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분명 내 손에 두었다고 느껴졌는데 어느 순간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고 만다. 해변에 가득한 모래알처럼, 두 손으로 아무리 쥐어보아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면 손에 남은 건 고작 몇 알의 모래알 뿐이다. 그것이 나를 안달나고 미치게 만든다.
나는 희 덕분에 내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린 적이 있다. 모래사장에 깊숙히 구덩이를 파고 내 몸을 묻은 후 빠져나오면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신발과 호주머니 등에서 끊임없이 모래알이 발견된다.
바로 희가 그렇다. 내게 희는 끊어낼 수 없는 자잘한 모래알로 가득한 구덩이와도 같았다. 이미 그녀에게 한번 온 몸이 잠겼던 나는 그녀에게서 빠져나오려고 시도했다. 분명 그녀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는데 여기 저기 흔적이 가득 담긴 절망의 늪이 날카로운 손 끝으로 내 발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그것은 결코 유쾌한 감정이 아니었기에 나는 다시 내 자신을 잃기 전 그녀를 스스로 잃기로 다짐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희는 입술을 깨문 채 나를 원망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게 말을 거는 그녀의 음성은 평소와 같이 나긋하지 않고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조금 처진 눈망울을 간직한 긴 속눈썹이 리듬감 없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녀에게 휘둘리는 것이 지긋지긋하여 내가 고한 최초이자 최후의 작별이었다. 후회하진 않았지만 그녀 또한 납득하지 않았다.
회사 사무실은 내가 소유한 건물의 3층에 위치해 있었고 외부 청소업체가 건물 전체를 관리해 준다. 일처리가 깔끔하여 큰 불만 없이 줄곧 이용해 온 업체였다.
어느 날 낯익은 청소업체 직원이 우물쭈물 하더니 내게 서류봉투에 든 것을 건넸다. 열어본 봉투에는 분비물이 묻은 화려한 레이스가 수놓인 여성의 속옷이 들어 있었다. 자주 보아 익숙한 디자인이었다. 직원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내 책상 아래에서 주웠다고 했다. 희의 속옷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차분히 할 말을 골랐다.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었다. 다음부턴 그냥 버리세요, 라고 말하는 나의 얼굴을 넘어 귀까지 빨개지는 것을 본 청소업체 직원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나갔다. 수치심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희와 나는 함께한 세월이 10년이었다. 그녀는 온통 가시로 뒤덮인 나의 청소년기를 푹신하고 두터운 그녀의 모래알로 감싸 위로해주었다. 광활한 모래사장에 바늘 하나를 묻으면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듯 그렇게 그녀는 나의 가시들을 그녀가 품은 모래알로 가득 숨겨 주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내 가시로 그 누구도 찌를 수 없었고 때론 가시가 있었던 사실조차 잊고 넘길 때가 많았다.
천사 한 명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과 이유를 서술하시오.
당시 나는 손 끝으로 가볍게 치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듯한 비눗방울과도 같았다. 겉이 번지르르하게 오색 빛이 반사되는 비눗방울은 사실 그야말로 속이 찬란하게 공허하다. 터지면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예민하고 날카로운 내 곁에는 누구도 오지 않았다.
오직 희만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아무리 털어도 끊임없이 딸려오는 모래알처럼 내게 남아 맴돌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도 없는 내 곁에 홀로 남아 있었다.
가족보다 더욱 그녀와 가까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모습 중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물으면 도무지 고를 수가 없다. 언제나 차분하고 단정한 모습이나 시어들 듯 환하게 웃는 표정이라거나 가늘게 뻗은 손목과 발목, 그녀가 머리를 묶을 때 훤히 드러나는 하얀 목덜미 등 내가 좋아하는 그녀의 장면은 많고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언제부터 동성을 좋아했냐고 물으면 또 그건 대답할 수가 없다. 나는 마음먹고 동성을 좋아한 적은 없지만 평생에 걸쳐 사랑한 사람은 오직 희 뿐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 좋아하고 영생을 함께 해야 할 운명과도 같았다.
희는 내가 사업을 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일적으로 어울리고 소통하는 것을 보며 점점 나를 잃는 기분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구매대행으로 시작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포털사이트에 사업자등록을 마친 후 가방이나 화장품 등 물품을 국내에서 거래되는 가격보다 조금 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도록 했더니 고객들이 금세 늘어났다. 나는 고객 풀을 이용하여 시장에서 여성 잡화를 직접 떼어서 팔거나 인기 포털사이트의 최저가 상품 운영 등을 하면서 점점 일거리가 늘어났다.
오늘이 1월인지 3월인지, 월요일인지 목요일인지 가끔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눈을 감으면 잠에 들고 눈을 뜨면 일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희에게 연락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언제나 하나였기에 그녀는 이런 나의 변화를 견디지 못했다.
희는 글을 썼다. 나는 타자기 위에 가지런히 얹혀진 그녀의 길고 쭉 뻗은 손가락을 좋아했다. 그녀는 무엇인가에 골똘히 잠긴 채 피아노를 치듯 타탁, 부드럽게 손을 놀렸다가 다시 타닥, 한 단어를 그리고 한 문장을 완성하곤 했다. 눈을 위로 뜨며 붉은빛이 감도는 입술로 무엇인가를 중얼중얼, 읊다가 홀로 웃고는 다시 타다닥, 빠르게 타자를 치곤 했다.
그녀의 머릿 속에선 어떤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지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 세계에 스스로 잠겨있는 그녀의 모습이 참으로 고요해서 좋았다.
그녀는 모래사장 위에 글씨를 쓰듯 타자를 치곤 했다. 어린아이들이 손장난을 치듯 천진한 표정으로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녀는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면 스스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몇 시간이고 글을 썼다.
한낱 글에게 질투한 적이 물론 있었다. 대체 무엇을 그렇게 쓰는지 물으면 그녀는 얼버무리며 그냥......이라고 했다가 다시 생긋 웃어보였다. 그녀는 한 계간지나 신문사에 꾸준히 글을 투고했지만 단 한 번도 좋은 소식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은연중에 희가 글에 집중하는 모습을 무시하곤 했다. 글을 쓰는 그녀의 모습이 좋았으나 대체 뭘 위해서 저렇게 집중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나이를 먹도록 스스로 자립하지 못한 채 꿈만 쫓는 그녀가 한심했다. 어쩌면 어머니 때문에 더 이상 꿈을 쫓지 못한 나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무시였을 것이다.
은연 중에 뭘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고 빠져있어, 라는 나의 무시가 얼핏 담긴 말을 듣고 희가 몇 번 상처받은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다. 나는 알고도 모른 체하는 비겁함을 그림자 속에 숨겼다.
본인에게 밀려오는 파도의 깊이와 너비를 측정하고 파도가 생긴 원인에 대해 서술하시오.
희는 내가 언제 일어났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등에 대한 자질구레한 일상을 전부 공유하고 싶어했다. 나는 그런 그녀가 점차 지겨워졌다. 그녀는 내 일기장이 아니었기에 나는 사소한 일상을 쉽게 그녀와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그녀가 뭘 먹었는지, 어디에 다녀 왔는지, 어떤 약속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시시한 이야기 보다는 당장 나의 고객이 일주일 전에 주문한 물건을 아직도 받지 못했다는 클레임이나, 계약한 택배 회사가 파업을 하여 대량으로 물류센터에 넘어간 물건이 출하가 되지 않는 점이 더 중요했다.
희는 평소와도 같은 차분한 태도가 아닌 불안정한 모습으로 이별을 거절했다. 희는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 점을 내가 몹시 좋아했다. 툭하면 화내고 울음을 터뜨리는 나와 달리 희는 언제나 침착하고 변함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날도 희가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러지 않은 그녀의 모습이 몹시 실망스러웠다.
그 후로 청소업체 직원을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몰랐다. 그 직원은 내 얼굴을 볼 때마다 어색하게 웃으며 우물우물 인사했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결국 나는 오랫동안 인연을 맺은 청소업체와 계약을 해지할 수 밖에 없었다. 딱히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정돈해주던 업체였기에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새로 구한 청소업체는 언제나 만족스럽지 못했다.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건물 계단에는 종종 발자국이나 진흙이 닦이지 않은 채로 굳어 있거나 화장실에는 필요한 비품 등이 자주 떨어지곤 했다. 나는 이 모든 일상의 불화가 희로부터 기인했다고 결론 내렸다.
띵동.
벨이 울린다. 이 이른 시간에 누구도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숨을 죽이고 인터폰 화면을 바라본다. 낯선 사람이다. 저 사람은 얼마 전부터 종종 저렇게 벨을 눌러 문을 열어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인터폰 화면을 노려보고 있다. 나는 단 한번도 그에게 대답을 전해준 적이 없다. 그저 액정 화면을 사이에 두고 서로 노려만 볼 뿐이다.
저러다가 제 풀에 지치겠지, 하고 두면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부동자세로 화면을 노려보고만 있다. 모자를 단단히 눌러 쓴 그의 입매가 베란다로 스며오는 겨울 바람처럼 매섭다.
그의 입매는 오빠를 닮았기에 나는 경찰도, 경비원도 부르지 않은 채 그저 이렇게 인터폰 화면만 바라보곤 한다. 내가 아는 척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이는 이렇게 안전하다. 내겐 오빠를 닮은 사람을 내칠 일 밀리미터의 용기가 부족하다.
그는 어쩐 일인지 오늘은 금방 자리를 뜬다. 스스로도 너무 이른 시간에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타인의 방문은 섬뜩하면서도 기이하다. 무슨 이유로 우리 집을 자꾸 찾아와서 벨을 누르는지 궁금하지만, 내가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우리 집을 찾지 않게 될까봐 두려우면서도 아쉽다.
어릴 적 보았던 요정의 날개를 꺾었던 이유에 대해 있는 대로 서술하시오.
우리가 결코 헤어질 수 없다고 그녀는 자신했지만 나는 이미 그녀 없이 버티는 생활에 익숙해 진 후였다. 내가 좋아했던 그녀의 맺고 끊음이 명확한 모습은 시간에 묻혀 사라져 갔고 거치덕거리는 집착만이 남은 모습으로 기억에 관통한다. 그녀는 이미 처음에 내가 내 자신을 잃었을 때 날 떠났어야 했다. 그 때 미련하게 우리의 끝난 사이를 끌어오지 말았어야 했다.
아름다운 추억이 변질되는 일은 슬픈 일이다. 희를 떠올리면 더 이상 아랫배가 크게 욱신거리며 젖어들거나 가슴 한 켠이 찌르르 아파오지 않는다. 그 점이 나를 마음 아프게 한다.
그저 비 오는 날 잔뜩 젖은 옷을 채 갈아입지 못한 듯, 꿉꿉함이 가득 남은 구질구질한 느낌만 있을 뿐이다. 나를 말간 시선으로 바라보던 희의 순수한 얼굴도 지긋지긋하다. 그 맑은 얼굴과 눈빛을 한때 미치도록 갖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소유로부터 오는 행복은 한정되어 있었고 소유조차 하지 못한 미성숙한 감정이 주는 아픔은 여전했다.
TV엔 유명한 예능 프로그램이 재방송을 하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은 중년의 배우가 집에서 혼자 놀다가 문득 인공지능 프로그램에게 물었다.
너 나 사랑해? 패널들과 방청객들은 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는 배우 또한 얼굴을 붉히며 아, 내가 저랬나? 하고 부끄러워 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배우의 말이 끝나자 마자 그가 인공지능에게 날 사랑해? 라고 계속해서 묻는 모습이 나왔고, 구경하던 패널들은 기억이 대체 왜 나지 않느냐며 그를 놀려댔다.
그 물음에 담긴 외로움의 깊이가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다. 외로워서, 사람이 아닌 기계라는 걸 알면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확인하고 싶어한 그 마음이 어떤 뜻인지.
남들이 주지 않는 애정의 갈망이 엉뚱하게 착지한 도착지의 의미를 안다. 확인하고 싶은 상대가 아닌 제 3자에게 감정을 물음으로써 대답이 어떻게 돌아오든지 간에 그것이 날선 외로움을 일부 잠재워주는 것을 안다.
사람에게 감히 묻지 못하는 질문의 무게를 알기에 애써 사람이 아닌 것에게 향해야만 하는 이정표의 의미를 안다.
인공지능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했다. 희에게 사랑한다고 할 때마다 그녀가 내게 한 말과 정확히 일치해서 나는 순간 진짜 인공지능이 맞는지 그만 아득해졌다. TV속에선 그 대답을 듣고 정신없이 웃는 패널들의 모습이 가득했다. 나는 그토록 찾지 못했던 리모콘을 한 번에 잡아 TV를 껐다. 이미 늦은 오전이었다. 슬슬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