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이디함 Sep 16. 2024

최시원이 "그녀에게 잘해줘"라고 말했지

[제19편] 레오 두 번째 이야기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눈 후, 천장을 바라본 채 깊은 숨을 들이내쉰 그는 말했다. 



나는 사실 요즘 정신상태가 퍽업(f***-up) 됐어 (= 엉망진창이 됐어)
도파민 중독자인 것 같아.




레오는 이어서 말했다.


"전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올해초부터 데이팅 앱을 시작했어. 그때부터 내 정신상태가 조금 꼬이기 시작한 것 같아. 너무 쉽게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니까 그 누구에게도 어느 선 이상으로 감정이 자라지를 않더라고. 물론 베트남 호치민이라는 환경 때문에 그러한 것도 있어. 회사에 다니는 미혼의 서양 남자로서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여성은 많으니까. 


그래도 나는 너랑은 다르고 싶었어. 우리가 처음 알게 된 상황은 내게 정말 특별했거든. 살면서 나는 누가 그렇게 먼저 말을 걸어준 적이 없었어. 너와는 쉽게 만나고 싶지 않았고, 감정이 자라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어. 그래서 그동안 키스도 섹스도 최대한 늦게 하려고 했던거였고. 그런데 잘 모르겠어. 네 잘못이 아니고 내 정신상태가 문제여서 해결이 되지 못할 것 같아."



그의 창문으로는 호치민을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인 랜드마크81이 보였었다.


어두운 방 작은 오렌지색 침대등이 켜져 있던 그의 방에서 두 알몸은 서로를 마주하지 않고 대자로 뻗어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필자는 레오의 석고대죄 후 복잡한 감정에 빠져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우선은 필자와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래 이놈아. 나도 노력하고는 있지만 노력과는 별개로 누군가에게 깊이 있는 감정에 빠져들고 그 감정을 지속시키는 것이 더 이상 쉽지가 않아. 너도 마찬가지야. 너한테도 솔직히 깊이 있게 빠질 것 같진 않아 그런데도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이 깊어질 수도 있으니까 노력하고 있는거야.'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지. 그래도 이렇게 솔직하게 자기 상태를 표현해준 남자는 드물다고 생각했고, 문제를 회피하기 보다는 직접적으로 대화하고 서로의 기대치를 맞추려는 모습이 성숙하게 보였다. '좋은 사람이구나. 내가 혼자 이 관계가 무엇인지 아리송하게 두지 않고 자기의 상태와 상황을 포장없이 설명해주어 고맙네' 하고 생각했다. 


그 다음은 낙심했다. 필자도 깊게 뿌리 박힌 사랑에 대한 불신 때문에 최근 6년동안 진득하게 연애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마음이 붕뜬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분명한 신뢰를 보여줌으로써 그 불신이 깨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나마 그동안 만나던 사람들은 아무리 단기간이고 호르몬의 장난이었을지언정 필자에게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줬었다. 그런데 레오는 처음부터 확신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아, 이 사람과의 관계도 어중이 떠중이가 되겠구나. 이 사람과도 장기전으로 가기는 어렵겠구나.' 필자는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한 메커니즘이 발달돼 사람관계에 있어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호감도가 급하락 하는 편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또 안 좋았던 기억마자 미화시켜버리고, 관계를 끝낸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 사람과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떠올리며 아련해함.. 그래서 이렇게 블로그를 쓰는 것이겠죠,,) 그와의 관계를 이쯤에서 마쳐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그의 상태에 맞추려 하지 않고 내 상태를 고백했다. 


"그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 알아. 네가 문제 있는 게 아니야. 나는 이게 현대인에게 있는 흔한 현상이라고 생각해. 나 또한 네가 느끼는 것에 공감할 때가 있어. 그래도 나는 애매한 관계는 싫어. 감정이 쌍방향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시간을 갖고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에게는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 않아. 내 입장은 그래."


그날 대화가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날밤 이후로 필자는 그와의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기대치를 충족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내가 그의 메시지에 예의상 짧고 무뚝뚝하게 답장을 보내거나 아예 답장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는 꾸준히 필자에게 연락을 했다. 그리고 그 연락은 '부티콜*'이 아니었다. *Booty Call: "육체적인 만남을 위한 연락" 등으로 돌려 표현할 수 있으며, 더 직접적으로는 "밤늦게 만나는 연락" 혹은 "섹스하려고 부르는 연락"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요즘은 상사가 나를 힘들게 하지는 않는지, 구체적으로 상사가 어떻게 행동했길래 내가 속상한건지, 여행은 잘 다녀왔는지 등 주기적으로 필자의 일상과 기분을 살펴주었다. 필자는 그런 레오의 모습이 필자와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나처럼 이 관계에 있어 노력하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됐다. 그래서 그 이후로도 연락을 유지하고 주기적으로 만났다. 


어느날 그와 나의 공통친구인 어느 미국 친구가 말해주길, 그가 나를 만나기 전 말레이시아 여성과 7년간 교제를 했었다고 한다. 그 이별이 몹시 힘들었고, 헤어진지 1년이 안 됐다고 들었다. 그 미국 친구도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얘기해주었다. 필자는 그런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레오의 마음이 치유되고 새로운 연애를 할 수 있게까지 기다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필자는 본연의 목적성을 상실하고 방심해버리고 만다. 아님 필자도 호르몬에 놀아나 눈가리고 아웅하고 육체적 교류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레오와 보내는 시간은 갈수록 저녁에 집에서만 갖게 되었다. 그래도 낮에까지 같이 시간을 보냈고, 밝은 태양빛 아래에서도 서로 끌어안은 상태에서 그의 폰으로 웃긴 영상을 같이 보곤 했었지만 말이다. 필자는 침대 위에서만 사랑의 순간들이 생겨나는게 싫어서 다시 전략적 사고를 발휘해보았다. 마침 회사에서 슈퍼주니어가 출연하는 워터밤 컨셉의 뮤직 페스티벌 VIP 티켓을 배포해주었고, 필자도 1인 동행인과 함께 갈 수 있다고 들어 그를 콘서트에 초대했다. 그는 처음으로 K팝 페스티벌에 가는 것이라며 선약을 깨고도 오겠다고 대답해주었다.



사진 출처: Wow K-Music Festival Facebook



그렇게 같이 워터밤 페스티벌에 가게 됐다. 그날은 우리가 만났던 날 바로 다음날이었어서 우리는 처음으로 일주일에 이틀을 연달아 만나게 됐다. 그건 우리에게 흔한 일이 아니었다. 보통 우리는 1-2주에 한 번씩 정도로 봤었으니까. 페스티벌장을 향하는 택시에서부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레오는 친구 사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무뚝뚝했다. 택시에서는 필자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고, 말없이 다른 방향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워낙 프랑스인들이 새침하고 제멋대로일 때가 많다보니 그냥 '피곤한가? 센치한가? 긴장되나?' 정도로 생각하고 넘기려고 했다. 분위기가 영 풀리지 않아서 술이 필요했는데 페스티벌장 내에서는 술이 금지돼 있었다. 다행히 슈퍼주니어가 가장 마지막 순서라서 그 전까지 가까운 술집에 가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페스티벌장 주변으로는 병맥을 파는 보틀샵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마시고 싶은 병맥을 사서 밖에서 마시기로 했다. 



Van Phuc City Water Music Square 구글맵 검색 결과 그와 맥주 마시던 스팟을 찾음. 저 호수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는데..




페스티벌장은 호치민 내에서도 신도시 같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일산호수공원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크고 깨끗한 호수와 그 호수뷰를 즐길 수 있는 조형물이 잘 설치돼 있었다. 우리는 호수 옆 외부 공공 무대 같았던 곳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의도치 않게 낭만적인 분위기였다. 사랑에 빠지기에 딱 좋은 온도, 습도와 장소였다. 그때 그가 장난가득한 목소리로 "Ooh~ this is so romantic~" 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우리 둘의 관계를 로맨틱하게 만드려는 멘트가 아니라 비아냥대는 말투였다. 굳이 한국말로 느낌을 얘기하자면 "워메~ 허벌나게 로맨틱하네그래~" 이런 느낌이었달까. 그전날 밤만 해도 나긋하고 다정한 표정과 목소리였는데 그날은 도통 느낌이 달랐다. 


그래도 워터밤 페스티벌이다 보니 물총으로 물뿌리며 장난치고 놀았고, 회사 홍보대사인 슈퍼주니어 최시원이 우리 직원들과 동행인들을 백스테이지에서도 만날 수 있게 초대해주어 감사인사를 하러 갔을 때 최시원 홍보대사님이 레오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남자친구냐고 물었다. "그냥 친구예요 친구"라고 대답하니 시원님이 친히 레오에게 "Take good care of her" 라고 말해줬다 (시원님 사촌오빠 같네,, 혼자 내적 친밀감 상승).





백스테이지에 찾아 갔던 우리 직원들 중에는 미국인 이모직원도 있었는데 그녀는 남편이랑 함께 와서 서로 꼭 손을 잡고 있었다. 그들의 꼭 붙잡은 손을 보고, 필자는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리도 나름 남녀 사이로 간 것이었는데 육체적으로는 할 것 다 한 사이면서 손은 커녕 어깨나 허리를 잠시 터치한다든가의 등의 다정한 스킨십이 하나도 없었다.







페스티벌이 끝나고 레오는 배가 고프다며 한국 치킨을 먹으러 치바고(Chivago)에 가자고 했다.





흠 배가 고파서 그동안 새침하게 굴었던건가 (그런 사람들 은근히 있음) 싶어서 같이 먹으러 갔다. 또 나름 한국식 치킨집을 가고 싶어 하길래 한국의 쏘맥을 소개하려고 했다. 여태껏 외국을 살면서 필자가 한국의 술문화를 설명해주고 퍼포먼스를 보이면 백이면 백 엄청나게 좋아했다. 그런데 레오는 시종일관 뚱한 표정이었다. 에어콘이 너무 세서 내가 추워하고 있었는데도 시큰둥했고, 내게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이후에 서로 대화를 하고 알게 된 것이지만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나를 질려하고 있었다. 밥을 다 먹고 자연스럽게 그가 나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려는데 결국 나는 서운함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말했다. 



You're not affectionate enough.
애정이 부족해. 충분히 다정하지 않아. 



레오는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바로 순식간에 무심하고 뚱한 표정에서 자상한 표정으로 바뀌며 나의 손을 ..  하루종일 잡지 않던 나의 손을 그제서야 .. 잡아주었다. 그러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Oh babe.. I thought we talked about this. (아이고.. 우리 이미 이 얘기는 했었다고 생각했는데..) 일주일에 이틀은 너무 나한테 과했던 것 같아. 우리가 사귀는 사이는 아니잖아. 나는 오늘 너를 만나는게 너무 피로했나봐. 미안해 내가 너무 무심하게 굴었다면."


화가 났다. 쏘맥을 몇 잔 털었더니 화를 삼킬 수가 없었다. 잡아준 손을 떨치고 물었다. "무슨 얘기를? 나는 너에게 내가 감정을 디벨롭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 육체적 관계를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었지. 내가 그 부분에 대해서 확실하지 않았니?" 그는 확실했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너는 내게 계속 연락을 했지. 나는 우리의 관계를 끝내려고 의도적으로 네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던 적도 많았어. 너도 그건 느꼈잖아." 그는 느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계속 나한테 연락했어? 섹스가 하고 싶어서? 그럴려면 할 수 있는 여자야 많잖아!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얘기했는데 왜 나한테 계속 연락했냐고!!!



그러면 내 입장에서는 네가 내 기대치를 이해하고 너도 노력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였지 않았겠어??"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대답하지 못했다. 



"깊은 감정으로 이어가지 못하는거면 다시는!!! 다시는!!! 내게 연락하지마!!!" 라고 외치고 화가 나서 집을 가려고 한 발 내딛었는데 쏘맥에 취한 나는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그날 발목 정면이 긁혀 피가 났는데 아직도 거의 1년이 지났는데도 그 흉이 거뭇하게 남아있다. 그 1년의 시간동안 나는 거뭇한 흔적을 볼 때마다 그날밤이 생각나 가슴의 작은 파편들이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왜 사랑 받지 못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며.



필자는 정말 웬만하면 화를 안 내는 사람이다. 정말! 인내심 하나만큼은 필자가 자신있게 강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몇 차례 인내심 끝에도 기분이 반복적으로 나쁘면 소리소문없이 마음의 벽을 두고 차단하는 일은 있어도 웬만하면 상대방에게 화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정말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상당히 외교적이고 공문 같은 말투로 그동안의 감사인사와 앞길의 안녕함을 빌어주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고 끝낼 정도로. 그런데 그날 레오에게 그렇게 필자가 숨겨온 모습을 드러냈다. 







그 후 3개월이 지났다.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새벽 2시쯤 그에게서 DM이 와있었다. 




I really miss you. Can we meet and talk about it again?






레오의 이야기는 다음 편인 제20편에서 이어집니다.




**뜬금없이 우리 최시원 홍보대사님을 제목에 넣어서 어그로 끈 점 죄송합니다. 아무튼간 우리 홍보대사님께서도 친히 레오한테 나 잘 돌보라고 덕담까지 해주셨는데 말이야!! 





이전 18화 자꾸 눈 마주치는 사람한테 먼저 말을 걸어보았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