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편] 레오 첫 번째 이야기
시몬과의 만남에는 오랜 공백이 중간중간에 있어 왔다. 처음에는 그냥 친한 무리의 사람들 중 친구 관계로만 지내 왔고, 이후에도 거리를 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기치 못하게 시몬과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여파가 너무 커서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고, 적어도 당분간은 어떠한 종류의 연애든 중단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도 완전히 중단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독하게 외로운 호치민 생활이었는데 그 외로움은 혼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잠깐 머물다가 떠나가는 자들로 인한 마음의 온도 차이 때문이었나 싶다.
어느 날은 사이공 내 외국인들 대상으로 맥주 축제가 열려 친구들과 함께 갔다. 당시에는 Saigon Outcast 라고 여러 가게들이 한 군데에서 팝업스토어처럼 자신의 상품/음식을 소개할 수 있게끔 공간이 마련됐었고, 그래서 피자, 채식, 칵테일, 맥주 등 다양한 컨셉으로 이벤트가 열렸었다. (최근에 이곳이 없어졌다고 들었다.)
친구들이 먼저 축제 장소에 도착해 있어서, 뒤늦게 혼자 축제장에 들어가려고 줄을 서는데 내 앞에 한 서네명이 서있었나? 그중에 앞앞에 서있는 멀대 같이 키큰 남자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혹시 기다리는 사람이 뒤에 있어서 그런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그의 눈은 두리번거리는 것이 아니라 자꾸 나를 향해 있었다. 자기 친구로 잘못 오해한건가? 내가 좀 닮았나? 생각하고 넘기려는데 정말이지 오해라고 하기에는 너무 반복적으로 뒤를 돌아 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특출나게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그냥 흔한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대학교의 키큰 공대생 같은 비주얼이었달까. 단정하지만 뭐 하나 포인트 없는 밋밋한 패션과 인상. 그냥 건강하게 자랐지만 크게 정의로움을 위해 나설 인재는 아니고 그저 평탄하게 규율을 지키면서 살아온 얼굴이었다. 햇빛이 반사될 때 금빛을 띄는 반투명한 갈색의 머리색깔과 배구선수 같이 길게 뻗은 허리, 팔과 다리. 조금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 나를 향한 눈빛에는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이 글을 쓰면서 그에게 닮은 배우 있냐고 실시간으로 물어보니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댄다. 필자는 영화를 정말 잘 안 봐서 몰랐는데, 사진 찾아보니까 진짜 닮았음. 여기에 안경 쓰면 매우 흡사!
'꽤나 매력적이네'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보였다. 친구들과 만나 신나게 수다 떨고 맥주를 마시면서 두어 시간은 보냈다. 다른 장소로 이동하려고 축제장을 나서는데 앞서 보았던 그 멀대 같은 남자가 친구들 무리와 함께 출구 쪽에 있었고, 그는 또다시 뒤를 돌면서까지 나를 여러 차례 쳐다보았고 심지어 조금 싱긋 웃고 있었다. 오케이, 이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한 신호다. 그는 내게 호감이 있다. (여기서 잠깐, 맥주 축제였어서 필자는 맥주를 엄청 마시고 텐션이 잔뜩 오른 상태였음). 필자는 친구들 무리의 한 가운데에 있던 그에게 다가가 대뜸 물었다.
"Where are you from?"
세 가지 시나리오가 있었다. 독일인이라고 하면 독일에서 살던 얘기를 하며 독일어 실력을 뽐낼 생각이었고, 이탈리아인이라고 하면 한국이 아시아의 이탈리아인걸 아냐고 말하면서 관심을 살려고 했고, 스페인인이라고 하면 베트남 오기 직전에 마드리드 여행 간 얘기를 하면서 뒷발목에 있는 인생 첫 타투인 작고 소듕한 올리브 나뭇가지 타투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엥? 프랑스인이랜다. 말문이 막혔다. 프랑스인이라면 호치민에서 이미 두 명을 경험해보았고, 국민성으로는 그닥 선호하는 편이 아니었다. 공통점도 딱히 없고, 영어도 잘 못하고, 엄청 까다롭게 군다. "Oh..." 하고 말문이 막혀버리자 그는 싱글생글 웃으며 "You're Korean, right?" 이라고 물었다. 엇.. 어떻게 알았지? 여기서 만나는 유럽인들은 주로 그냥 베트남인이거나 일본인인줄 아는데. 알고 보니 한국 영화를 엄청 좋아한댄다. 이렇게 또 한류에 감사할 수가!
그의 친구들과 나의 친구들이 갑자기 대화하기 시작하는 우리를 놀란 표정으로 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많은 눈 앞에서 어떻게 배째라 그에게 다가가 대화를 시작한건지. 나 참 대단해. 맥주는 대단해. 우리는 개의치 않고 인스타그램 아이디 교환을 했고, 서로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그는 조금도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필자에게 DM을 보냈다. 그의 이름은 레오. 레오의 메시지는 이전에 만나던 사람들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줄여 쓰지 않고 제대로 된 문장, 한 번 메시지를 보낼 때는 보통 3, 4개를 보냈고, 나에 대한 질문이 꼭 포함되어 있었다. 메시지를 할 수 없는 상태일 때는 분명히 상황을 말하고 대화를 마무리 지을 줄 알았다. 그동안 너무 나쁜 남자들만 만나온걸까? 문과대 출신인 나는 글만으로도 사람을 분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에게서는 그린플래그만 날리고 있었다. 신사다웠다. 혹시 레오가 나의 운명의 상대인가?..
레오와 메시지를 시작한 이후부터 너무 오랜만에 두근거리고 설레고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의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가 '굿모닝' 메시지를 보냈고, 조금의 아쉬움도 실망도 묻어나지 않게끔 분명한 의사전달을 해주었다. 첫 데이트 약속도 원래는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거였냐면 데이팅앱으로 만나는 대부분의 서양 남자들은 해가 지고 어둑할 때 만나려고 하고,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좀 추잡한 모습을 공유하거나 친밀한 행위일 수도 있기 때문에 캐주얼하게 술만 마시는 것을 선호한다. 그런데 그는 나와 사람 대 사람으로서 알아가고자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시간상 점심은 맞지 않아서 평일 저녁 Heart of Darkness 에서 만났다.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맥주를 마시는데 뭐야, 지난 번에 맥주 축제 때 봤을 때랑 좀 다른 인상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좀 기크(geek) 같았다. 한 쪽만 뚫은 귀에는 검은 귀걸이가 있었는데 알라딘에 나오는 지니 같았다. 그의 인상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영어는 프랑스 액센트가 너무 진해서 처음에는 좀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였다. 맹구 같이 헤실헤실거리는게 처음 만남과는 달리 귀엽지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화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인상은 유해보였는데 꽤나 고지식적인 프랑스인이었다. 그래도 뭐 필자는 워낙 사람 만나는 자리에는 무던한 편이라 맥주랑 맛있는 안주가 있다? 그러면 웬만하면 다 좋은 시간을 가지기 쉬웠다. 그가 콜드플레이트를 시켰는데 내가 좋아하는 살라미랑 치즈가 잔뜩 나왔다 호호. 그 집이 콜드플레이트도 맥주도 호치민 물가로는 엄청 비싼 편이다. 그런데 레오가 호쾌하게 자기가 내는 것이다. 나도 호치민 기준으로는 돈 좀 있는 편이라 내가 내거나 더치페이 하는 게 익숙했는데 넘 호쾌하게 그러나 허세 같지는 않게 자기가 내겠다는데 그때 좀 멋있었다.
레오는 그대로 헤어지기는 아쉬운지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의 동네 근처 그가 좋아하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집(MIXUE)에 갔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사실 그닥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지 않았는데 레오는 엄청 아쉬워하고 미안해하며 편의점 아이스크림이라도 먹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근처 편의점에서 콘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샀고 타오디엔의 강변이 보이는 골목에서 건전하게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어느 호치민 거리에나 쉽게 볼 수 있듯이 근처에 쓰레기 더미가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그 순간이 정말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내 직감으로는 그때가 키스타임이었는데.. 웬걸? 그는 키스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작별인사 겸 한 쪽 볼에 조금 더 애정이 묻은 비쥬를 해주는 것으로 첫 데이트가 끝이 났다.
두 번째 데이트 때는 점심시간에 만났다. 필자가 예전부터 미술관 데이트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미리 미술관을 알아보았다. 사실 상대가 좋아할지는 좀 자신이 없었다. 미술관에 관심 없는 사람이 워낙 많다보니! 그런데 좋다고 하길래 티켓을 구매하려는데 아뿔싸! 매진이 돼버린 것이다! .. 레오는 내가 아쉬워 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미술관 전시 기대했었다면서 조금 찡찡대는 소리를 내는데.. 세상에.. (입틀막) 미술관 데이트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다? 의외네. 그 모습이 엄청 사랑스러워서 그를 향한 호감도가 확 올랐다. 결국 뭐 아쉽긴 하지만 마땅한 전시가 없어 그 다음 데이트는 그의 동네에서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다. Bep Vo 라는 식당에서 보았다.
미리 도착한 그가 식당 정중앙에서 카키색 티셔츠를 입고 앉아 있었는데 반투명한 그의 갈색머리와 색깔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잘생겨보였다. 맨정신으로 보려니 너무 간질거리고 긴장돼서 샐러드를 시켜놓고 절반밖에 먹지 못했다. 왜 이전 남자들이 첫 데이트 때 밥 먹는 것을 꺼려 했던건지 이해가 됐다. 밥을 같이 먹는 시간이 즐거우려면 어느 정도는 서로 맞고 편해야 하구나. 위(stomach)가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몸 안에서 댄스파티를 벌이고 있어서 깨작깨작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설렘이 가득했는데도 안타깝게도 첫 데이트는 썩 유쾌하지 못했다. 그와 밥을 먹으면서 얘기를 나눌 때 그가 필자에게 '목소리 좀 줄이라'는 말을 했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필자가 목소리가 작은 편은 아니지만 어디 가서 목소리 줄이라는 말을 들은 적은 초등학생 시절 아빠한테 들었을 때 이후로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레오의 영역인 타오디엔 2군이다 보니 옆 테이블에도 아는 사람이 있었고 그걸 의식하느라 조용히 말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식후 Dolphy 카페에 갔을 때는 야외 자리였고, 우리 말고는 멀리 테이블 하나뿐이었는데도 또! 나보고 목소리를 좀 줄이래는거다. 기분이 확 잡쳐버렸다. 너무 수치스러웠다. 운명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지난 며칠이 우스울 정도로 마음량이 줄어들었다. 말 안 하고 그냥 넘기고 그를 다시는 보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흠 그래도 그와 이렇게 끝내기는 싫어서 사실대로 기분이 좀 나쁘다고 말했다. 필자는 불편한 진실을 경청할만큼 성숙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솔직하게 말하고, 그럴 능력이 못되는 사람한테는 아예 얘기를 하지 않고 그냥 서서히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레오가 후자였더라면 분명 발끈했을텐데 다행히도 그는 전자였다. 정중하게 여러 차례 사과했다. 구문으로도 사과하고, 집에 가고 나서도 장문의 메시지로 사과했다. 필자의 목소리가 크고 잘못됐던 것이 아니라 본인이 유독 동네에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민하게 굴었던 것이라고. 그리고 필자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한테도 그런 말을 해서 친구가 기분 나빠했던 적이 있었다고. 그 정도로 사과를 해주니 꽤나 망한 데이트였음에도 필자의 마음이 또 풀렸다 (너무나도 쉬운 사람..)
그렇게 세 번째 데이트를 했다. 세 번째 데이트는 재즈 나이트였다. 지난 번 미술관 데이트를 못한 게 못내 아쉬워 다른 문화생활 데이트를 찾아보던 중 고안하게 된 전략적 코스였다. 그동안 매직트라이앵글을 겪으며 익히 경험하지 않았는가! 해가 떨어진 후 어둑어둑한 시간에 집에서만 하는 데이트 아닌 데이트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이미 알고 있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필자는 종종 연애를 하는 데에 있어 생각보다 브레인이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 연애도 게임의 일종이라고 본다면 전략을 갖고 무브를 짜야 성취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뭐 재즈 공연 하나 찾아놓고 이렇게 허황되게 얘기하는게 조금 웃기기는 하구만 허허. 꼭 이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필자는 종종 필자의 외모만으로는 상대가 나에게 호기심과 호감을 갖도록 유발하지 못했을텐데 전략적인 말과 계획을 통해 대상을 덫으로 잡은듯한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공연장에서 그를 보았을 때, 나름 콘서트 데이트라고 반듯한 셔츠를 입은 모습이 또 사랑스러웠다. 멀쩡한 흰 셔츠만 입었어도 멋있었을 기럭지인데 어떻게 또 붉은색 잔체크가 들어간 깜찍하고 너디한 셔츠를 구했는지 참.. 그런 모습마저도 귀여워 보였다.
재즈 공연은 너무나도 낭만적이었다. 역시 문화생활 크으..! 우리는 무대를 중심으로 오른쪽 편에 앉아 있었는데 레오는 신사답게 당연하다는 듯 나를 중앙과 가까운 좌석에 앉히고 그는 나의 오른쪽에 앉았다. An Trần 이라고 베트남의 핫 차세대 색소폰 연주자가 나왔는데 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를 연주했다. (이때부터 이 노래는 필자의 최애곡이 됨)
공연장이 썩 효율적으로 설계되지는 않아서 앞 사람들 머리에 시야가 가려졌다. 필자는 어떻게든 머리들 틈새로 무대를 보려고 좌우로 왔다갔다 갸우뚱하다가 의도치 않게 그의 왼쪽 어깨에 머리가 닿았는데 (전략 아니었음..) 흐르는 색소폰의 멜로디가 너무 낭만적이어서 그대로 그의 어깨에 나의 머리를 기대었다. 아름다운 색깔의 조명과 부드럽게 흐르는 선율이 공기를 채웠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으로 그렇게 손을 잡았다.
공연이 끝나고 공연장에 나오자 그는 다시 머쓱해하며 내 손을 잡지 않았다. 그래도 뭔가 아쉬웠는지 칵테일 바에 가자고 했고, 바에서 옆옆으로 앉아 얘기를 나눴는데 거기서도 그는 나의 허리를 살짝 손으로 건들었을 뿐 놀랍도록 스킨십에 진전이 가지를 않았다. 아니, 세 번의 데이트가 지났는데도 키스를 안 해요?... 손만 잠깐 잡는 게 다라고요? 모든 것이 굉장히 천천히 흘렀다. 필자는 그가 필자를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별로.. 키스하고 싶지 않게 생겼나?' 별의별 생각이 들던 날들이 지나고 결국 그 다음 만남 때 그의 집에 초대되었다.
네 번째 만남 때가 되어서야 그의 집에 갔고, 사랑을 나누었다. 세 번의 데이트는 그렇게 세세히 기억하면서 그와의 첫 키스도 첫 밤도 기억이 잘 안 나네. 역시나 경험이 거듭될 수록 느끼는 건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서 상대의 '캐릭터'와 '스토리'가 분명해야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다. 레오와의 날들 중 첫 키스와 첫 밤은 정말 특별할 게 없었다. 그저 '역시 프랑스인은 놀랍고, 이 분야의 전문가구나'라는 것밖에. 역시나 엄청나게 예뻐해주고 케어해주고 보드랍게 물 밀려들어오듯 스킨십을 하는구나 정도 (심의를 지키기 위해 여기까지만 공개하겠습니다).
두 번째 밤 사랑을 나눈 후, 그는 천장을 보며 내게 석고대죄 하듯이 말했다.
나는 사실 요즘 정신상태가 퍽업(f***-up) 됐어 (= '엉망진창이 됐어' 정도로 해석해보겠슴다). 도파민 중독자인 것 같아.
??? 뭐라고 ???
그의 석고대죄는 다음 편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기대해주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