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편] 레오와 호치민 마지막 이야기
I really miss you. Can we meet and talk about it again?
발목에 남은 거뭇한 상처를 볼 때마다 가슴이 시큰거렸지만 - 시큰거림에도 총량의 법칙이 있는걸까? 거의 사랑고백과 다를 것 없는 그의 메시지를 보고도 감정이 미동치 않았다. 이제 와서 웬 뒷북인건가 싶었다. 지난 워터밤 페스티벌 사건으로 인해 레오에게 제대로 데인 필자는 더 이상 그와 잘해보고자 하는 의욕이 없었다. 필자는 MBTI에서 파워 N인데다가 지독한 낭만주의자이다. 이 두 가지가 합치면 사랑의 환각인지 환각의 사랑인지에 빠져 버린다. 어떠한 누군가와 연애 관계이든지 그 상대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모든 잘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상상하고 열어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상 속에서의 연애 상태 때문에 마음이 스멀스멀 자라나 버린다. 현실에서 실제로 상대가 사랑이 쌓일만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여태 이 블로그 시리즈에 출연한 상대들 모두 이 과정을 거쳤다. 레오 또한 그러했지만 이제는 확고하게 아니었다.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이 머릿속에 제대로 각인되었다.
그럼에도 필자는 누군가가 필자를 찾고 필자로부터 무언가를 원해서 도움을 요청할 때 좀처럼 그 도움을 구하는 손길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동 구호 활동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거겠지,,) 기가 찼고 꺼림칙했지만 만나서 무슨 말을 할지 들어줄 의향은 있었다.
"네가 지금 상황에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들어보긴 할게" 라고 대답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회사 직원친구가 회사에 타로카드를 갖고 왔고, 필자의 연애점을 봐주었다.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종교가 금지됐었던 나라인만큼 무속신앙과 미신을 많이 믿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에 비해 젊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것이 별자리점과 타로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MBTI를 맹신하는 것처럼 베트남 사람들은 별자리점에 맹신한다. 그리고 타로점 보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서 주변인들의 점을 봐주는 모습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앞으로부터 6개월간의 연애점을 봤는데 그 결과, 새로 등장하는 인물은 없을 예정이고 한 사람과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한댄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핵심적인 카드가 아래의 사진과 같은 것이다.
사자! 레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심지어 여인이 사랑스럽게 사자를 다루고 있다. 타로점을 봐주는 친구도 레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어서 이 카드를 보고 놀라워 했다. 안 돼! 싫어! 그럴 수는 없어! 뒤집혀져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내비치는 카드들이 머리를 쥐어싸고 있는 필자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레오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자꾸 레오가 로맨틱한 관계의 대상으로 나와서 어찌나 열이 받던지..! 나는 건강한 사람을 만나 건강하고 지속가능성이 있는 연애를 하고 싶지, 이렇게 매듭 풀어야 하는 연애는 하고 싶지 않아 이제 너무 지쳐!
때마침 레오에게서 답변이 왔다.
깊은 관계가 되지 못할거라면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었고, 그 이후로 3개월이나 지났으니 그가 내게 연락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이제서야 아쉬운거겠지?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니까 나만한 사람이 없는거겠지? 잡고 싶은거겠지? 깊이 있는 관계에 도전해보겠다고 말하려는 거겠지? 이거 받아줘야 돼, 말아야 돼? 나는 이미 마음이 짜그리 식었는데.. (역시나 파워N)
장문의 메시지가 왔다.
이성적으로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좋은 연애상대의 조건에 대한 체크리스트가 있었더라면 다 체크가 되었을 정도의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진지한 관계를 만들어가기에는 힘들 것 같다고 느꼈다고.
필자는 이걸로 대화가 끝일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알고 있는 얘기를 또 하려고 연락하지 말랬는데도 연락을 했다고? 그래서 우선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감정이 자라나길 바라는데도 자라지 않는 게 너의 잘못은 아니지. 네 상황을 이해해 그런데 나도 더는 감정을 발전시킬 수 없는 사람과 육체적 관계를 갖고 싶지 않다는 것 이해해줘. 그래서 연락하지 말라고 한거였고. 그래도 육체적 관계와 상관없는 친구 사이로 지내고 싶다면 나는 그럴 수 있어." 라고 대답했다.
내게 있어 그가 다시 연락을 하는 이유는 어떻게든 연을 유지하고 싶어서인데 그게 낭만적인 관계이든 친구 관계이든 둘 중 하나는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서 진지한 관계로는 이어지기 어렵다고 했으니 친구라도 되려나 보다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그의 대답은 그런 관계도 어렵겠댄다. 그러고서는 다시금 이미 알고 있는 얘기, 이미 했던 얘기를 반복했다.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비참했다. 굳이 필자랑 진지한 관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또 연락했다고? 이쯤되니 그의 의도가 파악됐다. 새벽 2시 술을 마시고 외로우니 품이 그리워 충동적으로 연락한 거였고, 그 다음날 후회는 했지만 이미 늦어버린 것. 뭐라도 말을 해야겠으니 구구절절 얘기를 하는건데 - 내심 그 마음은 내가 그를 더 구슬리고 설득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도 마음 깊은 곳으로는 알고 있으니까. 내가 보다 안정적인 정신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고, 웬만하면 다 포용할 수 있는 성격의 사람이니까. 어쩌면 그의 반복되는 toxic (위독한) 연애패턴을 끊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레오는 자기가 내게 상처를 남기지 않았길 바란다며 대화를 마무리 하려고 했다. 애ski.. 지 할 말만 하고 내빼는구나. 잠잠했던 마음을 휘저어 뒤죽박죽으로 만든지도 모른채. 너무 괘씸해서 이대로 대화를 마무리 할 수는 없었다. 이전과 같은 애정이나 희망은 없었지만.. 나 또한 그의 품을 그리워하긴 했었으니까, 타로카드가 말하길 레오가 답이 될 수도 있다고 하니까, 그를 조금 더 구슬려 설득해볼까 하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매번 구슬리고 이해해주고 맞춰주려고 온 힘을 다 하면서 내가 쏟는 정성에 비해 5%의 성의도 못받는 이런 연애패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겨웠다. 타로는 레오를 보여줬지만, 나는 그 운명을 거절할래. 더는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아. 필자는 마음가짐을 다시 잡고 대답했다.
그럴려고 다시 연락했니? 이미 알고 있는 얘기 또 하려고? 난 또 네가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얘기해보고 싶어서 연락한 줄 알았어. 네가 내게 다시 연락해야 할 이유는 없었던거야.
그는 미안하다고 대답했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와 끝난줄 알았다.
그 이후로 6개월이 지나고, 필자는 업무상 하노이로 발령나 호치민에서의 삶을 급히 정리하고 있었다. 한 달 내로 하노이로 이사하라는 얘기를 들은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던 날, 프랑스 국경일 바스티유 데이 행사가 있었다. 그간 호치민에서 지내면서 친하게 지낸 친구 중 한 명이 그 행사에 초대했는데 필자는 만나지 말아야 할 프랑스 남자가 (프랑수아, 시몬, 레오 + 블로그에 적지 않은 별 얘깃거리 없는 녀석까지) 넷이나 있어서 이거 참 가도 되려나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대부분은 거지깽깽이였고, 그 행사는 입장권이 1만원 이상인데다가 교양을 보여야 하는 장소라 걔네들 수준으로는 못올거라고 생각했다. (1만원 여유돈도 없던 거지깽깽이들을 사랑했던 내 자신.. 놀라워)
아뿔싸 그런데 그중 가장 멀쩡한 직업과 사회적 생활을 하는 레오가 그의 프랑스 친구들 무리와 함께 있었던거다. 후..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교양 있는 장소인만큼 외교적으로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 녀석??? 내가 인사하려고 쳐다보아도 고개를 돌리고 나를 외면하는 것이다. 소인배 같은 놈! 필자는 최대한 친구들과 행복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교양의 끝판왕으로(?) 공짜 와인을 잔뜩 마시고 격렬한 춤을 췄다.
잘 마시고 잘 놀았다!
하고 생각하고 집에 가려는데 마침 레오에게서 DM이 왔다.
Was that you at the Bastille event?
바스티유 행사에 있던거 너 맞니?
호치민에 계속 있었더라면 절대 답장을 안 했을텐데. 필자는 1년반 동안의 호치민 생활을 되돌아보며 그간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하나하나 생각해왔기 때문에 단호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곧 하노이에 갈거니까..! 작별인사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 그의 메시지에 답장했다.
"그게 나였다면, 네가 '안녕'을 했어야 했겠지?"
"지금 어디 있어?"
"나가기 직전이야. 맥주 마시러 갈래 말래?"
"갈게. 금방 나가 기다려줘"
행사장 정문 앞에서 그를 마주했다.
머쓱해하던 그는 물었다.
"어디로 갈까?"
이미 여러 잔의 와인을 들이켜 몽롱했던 필자는 눈빛에 별다른 감흥도 보이지 않고 말했다.
"글쎄, Heart of Darkness?"
"... 너 우리가 거기서 첫 데이트 했던 건 알고 있지?"
"그래서. 나 곧 호치민 떠날거라서. 추억회상이나 하자."
그렇게 택시를 잡고 우리는 Heart of Darkness 로 향했다.
도착한 후 우리가 첫 데이트를 가졌던 곳 하필 또 같은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보는데, 역시나 프랑스인인 그는 까다롭게 군다.
"행사장에서 와인을 마셨더니, 맥주가 마시고 싶지 않네."
(장난하나, 그럴거면 진작 말하던가..)
"그럼, 그냥 우리 집에 가자. 우리 집에 와인 두 병이랑 치즈가 있고, 수영장 있는 루프탑도 있으니 거기서 와인 마시면 좋아."
한 때 사랑을 나누었던 사내를 집에 데리고 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지금, 필자는 하노이로 이사를 와서 더 이상 이 집에 살고 있지 않다. 그리운 호치민 집. 외국인도 로컬 사람들도 적당히 복작복작(?)하고 정겹게 사는 벤탄군의 한 동네에 위치한 아파트. 단독 아파트인데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호텔 같이 엄청 깔끔한데다가 루프탑 공용 부엌과 수영장이 있어 손님을 초대하기에 최적합하다. 그닥 큰 수영장은 아니지만 얼마나 그 수영장을 사랑했는지..! 일주일에 두 세 번은 그냥 비키니 입고 풍덩 빠져서 혼자 호치민 하늘을 즐겼었지. 그 아름다운 순간에도 배영을 하며 '나는 왜 혼자인가~~ 이렇게 좋은 곳에~~ 이렇게 좋은 날에~~ 함께 할 사람 하나 없네~~' 라며 흥얼거렸었다.
이사 갈 생각을 하니 그동안 그렇게 좋은 집과 시설을 두고도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것이 영 미련이 남았다. 그 생각을 안 그래도 계속 하고 있었는데 레오가 맥주 안 마시겠다고 궁시렁대니 그냥 별 생각 없이 초대를 해버린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실 초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 항상 있었다. 친구는 항상 있었지. 그런데 내 특별한 사람, 편한 사람만 초대하고 싶었다. 그 자리에 나의 공간에 레오가 왔다. 아무도 없는 루프탑 바에 예쁜 조명과 내가 좋아하는 은은한 수영장 물냄새. 낭만적이어도 너무 낭만적이었던 분위기. 레오와 나는 와인을 마시며 기억에 남지 않는 얘기들을 나누었다. 그러고서 그는 옷을 벗고 팬티 차림으로 수영장에 들어갔다.
물 속에 들어간 레오는 나에게도 언능 들어오라며 부추겼고, 나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들어갔다. 아무리 더운 나라라고 해도 밤이 되면 조금 서늘해지는 기온이었다. 그는 춥다며 물 속에서 팔을 뻗어 내게 안아달라고 했다. "저리 가~" 라고 말해놓고 마지 못해 그의 뻗은 팔에 감기었고, 따뜻한 체온이 참방거리는 물 속에서 맞닿은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그 순간이 얼마나 포근했었는지. 어떤 사람은 포옹을 할 때 몸의 구조나 강도가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유독 레오와는 그런 게 없었다. 그냥 딱 퍼즐처럼 편안하게 맞는 기분. 레오 또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수영을 마치고 내 방으로 들어와 샤워를 했고, "이제 가~ 니네집에서 자"라고 퉁명스럽게 말했건만 그는 보송해진 상태로 나의 침대에 폭 몸을 맡기었다. "여기서 잘거야. 섹스는 안 해도 좋아, 그냥 커들하고 있을래." ... "허, 참" 어이없어 했지만 '어차피 이곳을 떠날거고 더는 그로 인해 마음 아파하거나 괴로울 일 없을테니 뭔들 어떤가! 나도 그냥 따뜻한 품속에 안겨 잠들래'라는 생각으로 침대에 있는 그의 품속에 들어갔다. 그러고서는 결국 사랑을 나누었다. 내가 나누고 싶지 않다고 하면 그는 충분히 절제하고 절대로 선을 넘지 않을 사람이란 것을 안다. 그런데 나도 그냥 하고 싶었다. 한다고 해서 내게 정서적으로 손해갈 것이 없다고 느껴졌다 - 이 부분이 바로 필자가 스스로 변했다고 생각한 부분이다. 이전에는 사랑을 나누고 난 다음날, 사랑을 나눈 사람과 진정 사랑을 쌍방향으로 교류할 수 없으면 그것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가졌었는데.. 더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그 주요 요인은 '마지막'이기 때문이었지만 필자는 이때 이후로 필자가 상당히 육체적 관계에 있어서 무감정해졌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그와 사랑을 나눌 때 마치 깊은 곳의 허구의 눈물버튼이 눌려진 것 같아 자꾸만 눈에 물이 차올랐고 도통 마르질 않고 쉴새 없이 터져 흘러내렸다. 레오는 당황하며 하던 행위를 중단하고, 혹시 아픈 것이냐며 자상하게 물었다. 필자도 당황하며 "아니야 아니야, 이건 아파서도 슬퍼서도 나오는 눈물이 아니야. 그냥 호르몬 버튼이 눌린 것 같아." 라고 대답했다. 감정과 호르몬을 구분하고 그 둘을 혼동하지 않는 것 - 그것이 필자가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배운 것 중 하나이겠다. 그것은 슬픔과 눈물뿐만이 아닌, 질투와 화, 사랑과 애정 등 이전에는 동일시한 개념들을 세세히 나누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다음날, 배드민턴 모임을 가야 한다며 우리집을 나선 그는 배웅해주는 나에게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러고서는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표정을 짓더니 "연락해도 되지..?"라고 물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또 사르르 녹아 싱긋 웃고, 그러라고 대답했다.
분명 섹스를 해도 별 감정이 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건만. 그가 배드민턴 모임에 가러 떠난 이후, 그 날 하루종일 마음이 괴로웠다. 죄책감은 아니었다. 지난 밤, 죄책감이 들지 않을거라고 확신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그를 진심으로 좋아했기 때문이었나보다. 마음이 없는 사람과 알맹이 없는 육체적 교류를 한다면 허무함이 밀려왔을 것 같은데 레오와 나의 사이에는 작은 알맹이가 있었다. 그렇게 한순간에 마음이 다시 절절해져서 다른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필자는 마음이 복잡할 때 종종 비즈공예를 하는데 실에 구슬을 하나하나 끼면서 감정과 생각을 돌이켜보니 더는 부인할 수 없었다. 나는 레오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디 나의 감정이 깊고 소중한 것이 아니길 바랐다. 그저 호르몬이 불어일으킨 후유증이라고 스스로에게 반복적으로 말해야만 했다. 레오는 배드민턴 모임이 끝나자마자 어떻게 지내냐며 연락을 했다. 나는 다시 그에게 안기고 싶고 애정을 쏟고 싶었지만 그가 나의 인연이 아니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고, 무의미하게 그와 연락을 주고 받으며 내 생각과 관심에 더는 그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 비즈공예 수련을 하며 보낸 한 시간 한 시간이 어찌나 괴롭던지..! 문득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그가 괘씸해졌다.
예-전에 매직 트라이앵글에 해당하는 첫 번째 사람, 트여르크 에피소드를 작성했을 때 그에게 팔찌를 만들어 선물한 후의 효과에 대해 작성한 적이 있다 (참고: 제4편 https://brunch.co.kr/@hhahm/9)
유치하지만 레오도 내가 호치민을 떠나고서도 나를 생각하면서 후회하고 아파했으면 했다. 그래서 그에게 줄 팔찌를 만들었다. 보통 1시간 미만이면 만드는 팔찌가 그날은 어찌나 마무리가 안 되던지! 어찌저찌 완성해서 작은 갱지 종이봉투에 담아 마스킹 테이프를 붙였다. 그러고서는 그에게 내일 시간 되면 만나서 얘기를 하고 싶다고 답장을 했다.
다음날 우리는 낮에 만났다.
그가 나를 픽업해주러 집 앞까지 오토바이를 끌고 왔고, 그의 동네로 갔다. 그는 어디로 갈까 고민하더니 그와 나의 오래 전 데이트 때처럼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너 그거 루틴이구나? 예전에 만났을 때도 그랬었는데" 라며 놀렸더니 그는 놀래며 "내가 그랬었어?"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 조금 서운해지는건 어쩔 수 없었다. 필자는 종종 이렇게 상대의 기억 속에는 간직할만한 가치가 없는 순간들을 너무 혼자서 의미부여하고 소중해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서글퍼질 때가 있다. 내가 아름다워 하고 애정하는 순간순간 속의 표정, 제스쳐와 무드를 나만큼 애정해주고 그 의미를 특별히 여겨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의 존재에 정말 감사할텐데.. 그러나 필자는 30대 중반의 고된 연애 전문가, 그런 K드라마 모먼트를 타인에게 기대하지 않게 된지는 오래 됐다.
타오디엔 군 사이공 강가에 있는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징그럽게 달고, 후덥지근했다.
'여기서 만난 모든 연인관계가 이 맛과 날씨 같았지. 갈증이 나서 눈 앞에 보이는 달콤함에 입을 열었지만 끈적거리고 답답해 오히려 더 갈증이 났었지..' - 상념에 잠겨 호치민에서의 날들을 돌이켜보았다. 입 안의 달콤함도 마음의 씁쓸함을 이겨내진 못했다.
부시럭 부시럭, 팔찌가 담긴 작은 갱지 종이봉투를 꺼내 레오에게 전달했다. 그는 참 성의있는 반응을 보였다. "이걸 내가 가질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네.. 고마워 정말"이라고 말하며 조금 감동받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그에게 모든 감정을 솔직히 털어 놓았다. 단 하나,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핵심적인 말만 제외하고. 하루종일 네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내 자신이 싫었다고, 그래도 어차피 이곳을 떠날테니 괜찮을거라고 죄책감 느낄 필요 없다고. 사실 뭐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을뿐 바보가 아닌 이상 내가 하는 모든 말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모를리 없었을텐데. 레오와 같은 마음가짐의 남자들은 그것을 느껴도 최대한 외면해하고 싶어한다. 마음 깊은 곳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엥 난 몰라!'라며 책임감을 느끼기를 거부하고, 현재형으로 그 달콤한 애정을 태양빛 쬐는 고양이 마냥 잔뜩 즐기고 싶어한다. '그래, 지금 잔뜩 나의 애정을 즐겨라. 내가 떠나고 나면 너도 트여르크처럼 팔찌의 늪에 빠져서 허전함을 느끼게 될거다.' 팔찌 보복이 성공하길 빌며 더는 선물이 아닌 '폭탄'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때마침 무시무시하게 먹구름이 밀려오더니 소나기가 거세게 내리쳤다.
우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강가에 있는 작은 쉼터에 들어갔다. 좁은 통로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모습이 젠장.. 누가 봐도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후두두둑 떨어지는 빗소리와 땅을 내리는 빗물이 터트리는 맑은 흙냄새. 낭만적인 상황을 함께 경험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상대와 이토록 낭만적인 배경이라니. 그 가치도 감사하지 못할 자와 이 순간을 보내야 한다니. 먹구름이 낀 하늘을 보며 신을 째려보았다. 레오는 쭈뼛거리더니 앞으로도 계속 연락을 해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라고 했다. 남자친구가 없으면 답하겠다고 했다. 호치민에 머물렀더라면 그와 연락을 유지하는 것이 자꾸 헛된 희망을 키워 마음을 괴롭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연락을 차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락을 유지하자는 데에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더 이상 그가 필자의 마음을 괴롭게 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어차피 나는 떠나니까. 절절한 사랑이었어도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지기 십상이니까.
지금 당장은 그를 너무 사랑해서 그를 꽉 안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싶었지만 그건 그냥 끓는 물의 소면같은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감정이 어떻게 사랑이야?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겠지. 그런데 나는 사랑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세상에 여러 유형과 종류의 사랑이 있고 그 중 하나라고 확신했다. 냉수에 한순간에 사그라들 감정이어도, 그 감정은 100도가 넘은 감정이었고 소면을 익혀버린 감정이었다. 그건 사랑이 맞아, 오래 가지 못할지라도. 사랑의 조건이 꼭 유지기간에 의해 확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어차피 영원한 것은 없다는 씁쓸한 확신에서 만들어진 사랑의 개념이었다. 생명도 인간도 사랑도 모두 다 사라져 없어질 개념이지, 사라지고 사그라들 감정이어도 사랑이었어.
더는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 우비를 쓰고 집에 가겠다고 했다. 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우비를 쓰고 빗발을 느끼며 오토바이 운전을 하는데 놀랍게도 마음이 더할 수 없이 평온했다. 하루 전만 해도 절절하던 그 감정은 '마지막'이 주는 마법 아래, 냉수 같은 빗물 아래, 잠잠히 사그라들었다.
(예고)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무엇이 사랑이냐에 대한 토의는 하노이 생활에서도 이어지게 됩니다.
몇 안 되는 저의 소중한 독자 여러분들, 안녕하세요
이 블로그 시리즈를 시작했을 때 20편을 목표로 했었습니다. 그때쯤 되면 벽없이 마음껏 사랑하고 애정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도 아직 1년 전 처음 만난 레오에 대해 쓰고 있군요! 사실 저는 레오에 대한 글은 쓰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하나의 에피소드로 담을만큼 강한 인상도 특징도 없는 밋밋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추억의 아름다움을 입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있었어도 없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잊혀지는 것이 그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이번 편에 나온 재회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이 블로그에 기록되지 않았을겁니다. 그런 사람인데 호치민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었네요. 그 다음부터는 현 하노이 생활로 이어지지요.
그동안 어떤 편은 일주일만에 또 다른 편은 거의 3개월만에 어찌저찌 꾸역꾸역 올리다보니 20편에 도달하기는 했네요. 제가 베트남에서 살게 된지도 1년 9개월이 되었답니다. 어찌보면 2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참 많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났어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세계를 엿보고 이 블로그에 기록해가면서 그동안 제 생각과 가치관에도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처음 이 블로그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조금 분석적이고 사색적인 느낌으로 기록했는데 점점 갈수록 그냥 연애담 사건 위주로 작성하게 됐어요. 다음 편에 레오 이야기를 마치게 되면 잠시 지난 연애를 돌아보며 추론해낼 수 있는 배움이 있는지 살펴볼 생각입니다. (스포일러: 하노이에 오자마자 또 해프닝들이 생겼지만요)
제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시고 위로가 되었다고 말해주시는 분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이걸 이렇게 꾸준히 작성해서 뭐하나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는데도 계속 올리게 됐어요. 이 블로그에 소개된 사람들만 해도 (한 단락이라도) 벌써 9명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다양하다고 해도 더는 크게 특이한 연애 케이스가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해요. 그쯤 되면 소재가 고갈되겠죠. 사람과 사람이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그 상대가 누구든 큰 틀로 봤을 때에는 그 흐름과 이야기가 다 거기서 거기더라고요. 이 블로그에서만큼은 만나온 모든 사람들을 최대한 그들만의 고유한 특징을 강조하며 특별하게 하나하나 포장하려고 하였지만, 특별한 것도 너무 많아지면 더는 특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염두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짧으면 3개월, 길면 9개월 남을 제 타지살이 기간동안의 연애만큼은 계속 작성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