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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함 Aug 20. 2024

돈 없는 사람도 만날 수 있을까

[제17편] 시몬 마지막 이야기


결국 약속한 주말이 아니라 그 다음날인 월요일

부이비엔의 한 루프탑 바에서 만났다. 


Le Fe Rooftop Bar https://maps.app.goo.gl/r71NABskGzqu7Lpn6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하겠다고, 저녁 먹자고 해놓고. 흥. 먼저 연락해서 겨우 만나게 된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하필 또 내가 먼저 도착했네. 자존심 상해 흥. 꿍한채로 Old fashioned 를 먼저 시켜서 마시고 있었다. 십여분 뒤 늦게 온 그는 머리를 털고 능청맞는 웃음을 띈 채 다가와 내 잔을 보더니 "엇 올드 패션드 시켰네?" 하고 바로 알아차렸다. 그게 또 뭐라고 나름 멋있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그래도 자기가 바텐더 출신이지 않냐며 으쓱였다. 그래 너도 네 분야에서 잘 하는게 있겠지 흥.




자존심이 상해서 꿍하면서도 눈과 눈이 마주했을 때 육신과 육신을 잇는 기류가 자기장을 만들고 있었다.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7-8개월을 술취한 원숭이 마냥 생각 없이 말하고 행동하던 우리들인데 첫만남인 것처럼 떨리고 낯설었다. 




지난 번 키스는 분명 시몬과 나 사이의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을 열었음이 틀림없다. 그날도 우리는 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했는지 결국 새벽 2시까지 열려 있는 TNR로 장소를 이동해야 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



이번에는 짐작으로만 느끼고 있었던 그의 어린 시절과 가정사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북아프리카 알제리아 출신이다. 보통 아프리카라고 하면 흑인종을 떠오르기 십상이지만 알제리아의 북쪽 해안 지역은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와 교류가 잦아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고 그중에서도 그의 어머니는 백인종의 (Caucasian) 외모를 띄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어떻게든 프랑스인인 그의 아버지와 얽히기 위해 콘돔에 구멍을 만들었다고 한다. 웹툰에서나 보던 내용을 시몬의 입에서 듣고 있자니 그의 삶이 참 드라마틱하다 싶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이 'the result of failed condom (훼손된 콘돔의 결과물)' 또는 'accidental baby (사고로 생긴 아이)'라고 칭했다. 자라면서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수도없이 많이 맞아왔다고 한다. 그의 밑으로는 동생이 있었고, 이후에는 어머니가 또다른 사람과 만나 아이를 가져 형제 자매가 4명 정도 된다고 했다.



그런 가족에서 자라왔는데도 그는 가족을 그 무엇보다 사랑한다. 부족함 없이 가진 거 다 갖고 살아온 나보다도 가족을 사랑한다.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씩 할머니 할아버지와 영상통화를 하고, 바텐더 일을 하면서 버는 돈이 월 60만원 정도밖에 안 되는데 그 돈을 아끼고 아껴서 절반 정도를 프랑스에 형제 자매들을 위해 보낸다고 한다. 그가 보내지 않으면 그들의 상황이 너무 찢어지게 가난하고 힘들다고 한다. 그 돈을 갖고 어떻게 저축하고 살지? 프랑스에서 바텐더로 풀타임 일해도 이것보다 다섯 배는 더 벌지 않나? 여러 가지 의구심이 들기는 했지만 그저 그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어린왕자와 여우의 관계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의 어린 왕자. 내 눈에는 시몬이 어린왕자 같다. 챗지피티에게 물어본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에서 어린왕자 성격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지? 챗지피티는 대답한다. 



Innocent: 어린왕자는 세상에 대해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함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으며, 종종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질무을 합니다. 

Curious: 그는 자신이 여행 중에 만나 사람들과 행성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해하며, 그들의 동기과 관점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Compassionate:  그는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깊이 신경 쓰며, 예를 들어 슬퍼하는 점등인이나 자만심에 빠진 사람을 도우려고 노력합니다.

Sensitive: 그는 자신의 감정과 다른 사람의 감정에 매우 민감하며, 이를 통해 만나는 이들과 깊은 관계를 형성합니다. 

Philosophical: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린 왕자는 삶에 대해 깊이 있는 철학적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존재론적 질문을 자주 묻습니다.

Lonely: 어린왕자는 종종 외로움을 표현하며, 이는 동반자와 의미 있는 관계를 찾으려는 그의 동기를 부여합니다. 

Adventurous: 그는 다양한 행성을 여행하며, 모험심과 미지의 세계를 탐함하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보는 시몬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 당시 친하게 지내던 한 영국친구 에밀리가 누가 봐도 시몬은 'f***boy'라며 감정을 가져서 좋을 게 없다고 말했었다. F***boy 가 뭔데? 챗지피티에 의하면 'f***boy'라는 용어는 감정적 헌신 없이 가벼운 성적 관계를 맺거나 성실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며, 타인의 감정을 존중하거나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래, 왜 에밀리가 그를 f***boy 라고 말했는지는 알겠어. 시몬도 자기 입으로 무수히 많은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다고 말하고 다녔으니 뭐. 그리고 그간 그가 어겨온 약속들과 그의 업무 태도를 보아도 그는 성실하지 않은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어린왕자와 f***boy의 유사점이 있을까? F***boy 로 불려지는 사람들은 사실상 어린왕자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그런 성격의 사람이 더더욱 가벼운 관계를 갖는 것을 추구하게 되지는 않을까? 챗지피티는 대답한다. "어린왕자와 f***boy 와 관련된 특성 사이에는 큰 유사점이 없습니다. 어린왕자는 순수하고, 자비롭고, 감성적이며 철학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진정한 연결을 찾고자 하며, 타인에게 친절하게 다가가고, 삶의 깊은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의 성격은 사랑, 공감, 그리고 진실된 인간 관계를 중심으로 합니다." 



필자는 꼭 두 가지의 모습이 상충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 속으로는 진정하고도 깊은 의미의 인연을 찾지만, 현실적으로 불가한 상황에 놓이다 보니 그 좌절감에 의해 감정적 헌신과 깊이 있는 관계를 회피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런 시몬에게 소설 <어린왕자> 속 '여우'가 되어주고 싶었나보다.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길들임(taming)'에 대한 책임을 가르친다. 여기서 길들인다는 것은 인간 관계의 변화하는 힘을 일러주는 것이다. 의미없이 스쳐갈 수도 있는 인연에서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해갈 수 있는 힘. 









커들링의 의미


시몬은 불우한 어린 시절로 인해 '정서적으로 고장난 (emotionally damaged)' 사람이다. 그는 사랑을 주고 싶고, 또 받고 싶지만 그의 삶에서는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너무 낯선 일인지라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는 내면 깊은 곳에서는 사랑을 받고 싶어하지만, 사랑을 받는 것이 편하지가 않다. 그래도 습관적으로 때때로 어딘가에는 마음에 담긴 애정을 쏟아내고 싶어했다. 그날밤 시몬은 내게 그 애정을 기꺼이 쏟고자 했다. "오늘 너의 집으로 가도 될까?"라고 물었다. 국내에서의 연애경험을 토대로 이 질문을 해석하자면 "라면 먹고 갈래?"나 다를 게 없다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남녀가 폐쇄된 공간에 있으면 당연히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시몬 그리고 그 이후의 관계에서 새로 발견한 것이 있다면 남자라고 다 그렇게 호르몬에만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남자이기 전에 사람이고, 육체적 사랑이 아닌 정서적 사랑에 목말라한다. 



그날 우리는 밤새도록 서로를 꼭 안아주고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고 작고 보송보송한 입맞춤을 서로의 볼과 이마에 잔뜩 퍼부어주었다. 독자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 딥키스도 하지 않았고, 옷도 벗지 않았고, 잠자리도 갖지 않았다. 그저 나는 강아지 같이 얇고 어두운 보릿 빛깔의 털이 고르게 난 그의 배를 둥글게 쓰다듬으며 귀여워하고, 그는 나를 뒤에서 껴안아 내 손과 깍지를 꼈다가 풀었다가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귓가에 소곤거리다가 웃고 입을 맞추고를 반복했다. 그 시간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 이후로 7개월이 넘도록 우리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 



7개월이 지난 뒤에야 그가 말하길, 그 다음날 아침 그가 그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택시에서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한다. 허물 없이 애정을 쏟고 받는 것이 너무 좋았지만 또한 낯설기도 했고, 감정이 틀에 갇혀져 있지 않고 터져 나오다 보니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고. 그는 그날이 그에게는 너무 강력하고 아름답고 달콤하지만 그의 현실과는 너무 괴리감이 느껴져 괴롭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제야 겨우 자기를 그저 들어주고, 자기의 상황과 마음에 대해 핵심을 짚어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매력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기 안의 무언가가 깨지는 것을 느꼈다고




그럼에도 7개월 뒤, 우리는 다시 또 만나게 되었는데..









화장실 괴한 사건


2024년은 참 필자에게 가혹한 해다. 우선 그 첫 스타트를 끊은 것은 '화장실 괴한 사건'이다. 1년간 호치민에서 살면서 가끔 화장실 거울에 손바닥 자국이 남는 경우를 보았다. 처음에는 물 자국이어서 그냥 내가 남긴 자국이려니 했고, 이후에는 일주일에 2번 청소해주는 청소직원의 자국이려니 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손바닥 자국이 다분히 의도적으로 바뀌어 갔다. 거울 구석에 어설프게 묻어나던 손자국이 점점 내 키보다 높이, 점점 정중앙에 '나 좀 알아봐줘' 식으로 생기는 것이다. 


추측컨대 필자의 아파트는 외부인이 방에 들어오기에는 어려운 곳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20명 가까이 되는 직원 중 한 명의 짓일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의심되는 남직원이 두 명 있었는데 심증뿐인지라 비난하기는 그렇지만 저녁에 근무하는 직원은 남직원들뿐이고 손자국은 저녁에만 생겼기 때문에 가장 유력했다. 한 번은 저녁 9시반쯤 헬스장에 갔다가 11시쯤 돌아왔는데 너무나도 선명하게 거울에 기름때 낀 손자국이 있었다. 헬스장에서 땀을 잔뜩 흘리고 와서 샤워는 해야겠고, 혹시 몰래카메라를 설치했을까봐 무섭기는 하고 해서 불끄고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만일 아파트 직원의 짓이라면 아파트 관리자한테 고발했을 때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 몹시 흥분하고 신날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래서 관리자한테 고발하기를 망설였지만 결국 설연휴 직전 고발했다. 베트남에서 제일 큰 공휴일인 설연휴가 지나자마자 바로 그 다음날 또 선명한 기름때 낀 손자국이 정중앙에 있었다. 



참고로 3군에 위치한 M Village 임.. 범인은 아직도 그곳에 있을테니 되도록이면 거기서 살지 말라고 말하고 싶음. 



복도에 설치된 몰래카메라를 8배속으로 보아도 아무도 방에 들어온 것을 확인할 수 없었다. 영상을 보니 부분삭제가 가능하여 더욱이 아파트 직원의 소행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한국에서처럼 법적으로 신고를 하고 일처리가 될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경찰도 물질적, 신체적 손해가 있어야만 출동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파트 관리자에게 바로 이사를 진행할 것이니 보증금을 달라고 했다. 좀 협박조로 얘기했더니 순순히 보증금을 주겠다고 하여 바로 이틀 뒤 이사했다. 그런데 그 설 연휴 직후 범행이 일어난 날, 명백히 누군가 의도적으로 손자국을 남겼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는 소름이 끼치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나 잘못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다른 사람들한테 알려야 할 것 같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다. 그러자 7개월 동안 연락이 없던 시몬이 메세지를 보냈다. 괜찮냐고, 너의 인생에 이렇게 또 끼어들면 안 되는건데.. 혹시 도움이 필요하냐고. 



사실 누군가가 같이 있어주면 좋겠다고 절실하게 생각했다. 친구가 있었더라면 친구네집에서 잤을텐데.. 어떻게 1년을 호치민에서 살면서 단 한 명도 부를만한 사람이 없나 싶어 속상했었다. 그런데 시몬이 집에 와주겠다고 말하니,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지난 7개월간 나는 그와 이성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완전히 신뢰를 잃었지만 그럼에도 그날밤은 절실히 누군가가 필요했다. 









공포를 이기는 그의 포근함


오랜만에 본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작은 엘레베이터에 둘이 있는데 7개월 전 느꼈던 자기장 기류를 그때도 느꼈다. 어색했지만 그냥 같이 끌어안고 잘 준비를 했다. 여기서 잔다는 것도 진짜 말 그대로 코 자는걸 말함. 깔끔히 씻고 느슨하고 편한 오버사이즈 티셔츠를 잠옷으로 입고 드러누워 그의 품에 안기는데 너무나도 포근했다. 1시간 전 느꼈던 공포가 한 번에 사르르 녹아버렸다. 필자는 158cm로 키가 작은 편인데 딱 180cm정도 되는 그의 체구가 어떻게 이렇게 끌어안을 때 맞는 구조로 채워지는지 도통 모르겠다. 그의 품에 폭 들어가 푸근하게 사로잡히는 기분. 얼굴과 얼굴을 마주했을 때 어두운 밤빛에도 빛나던 그의 푸른 눈동자.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그간의 근황을 공유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7개월 전, 그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울었다는 것도 그날 이야기해줘서 알 수 있었다. 



만약에 그와 성관계를 가졌더라면 결코 그날밤은 편하지 않았을거다. 필자는 아직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 못할 사람과 그런 관계를 갖는 것이 심적으로 불편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는 갖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알고 보니 그가 정말 심적으로 예민한 사람인지라 정말 편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강도 있기가 어려웠던 것. 그렇다고 성생활을 적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번 비아그라를 미리 먹어야 했다고 말했다. 필자의 나이가 서른이 넘어 실제로 겪은 경험도 경험이지만, 주변 사람들 이야기도 듣자보니 생각보다 이런 경우가 흔하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일종의 방화벽이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엥 근데 웬 언행불일치람..? 시몬의 말과 달리 시몬은 필자와 커들링을 할 때 내내.. 강도가 있었다.. 물어보니 그가 나와 있으면 편해서라고. 그래도 뭐 막상 하려고 하면 어떻게 될지는 또 모르는 것이다 보니 커들링만 하는 사이로 유지할 수 있었다. 



필자는 애인도 없겠다 뭐 커들링을 이렇게 주기적으로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에게 대뜸 "야, 우리 커들버디 하자. 한 달에 한 번씩 보자아! 너무 자주 보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어때? 복잡할 게 뭐 있어? 난 너에 대한 감정이 자라날 가능성이 1도 없으니 부담도 없네에! 너에게도 좋은거 아냐?"하고 쿨녀로 빙의해 제의했다. 그는 필자에게 "너 어쩔 때 보면 엄청 복잡하고 어려운 사람인데, 어쩔 땐 정말 단순해. 어떻게 그렇게 복잡한 상황을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어?"하고 물으며 웃더니 "좋아! 그러자!"라고 대답했다. 



그러고서는 일주일도 안 돼서 그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커들할 수 있냐고. 아니? 한 달도 아니고 일주일만에? 





아무렴 뭐, 나야 좋지! 집에 오라고 했다. 집에 온 그는 배가 고프다고 했다. 밤 10시가 지난 시간이라 음식 선택권이 많지 않았지만 대충 무난해보이는 피자집이 아직 열려 있어 배달주문했다. 그가 돈이 별로 없어서 굶고 다닌다는걸 알고 있다 보니 피자는 내가 사겠다고 했다. 필자가 평상시 먹는 피자에 비해 그날 배달주문된 피자는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 그럼에도 시몬은 정말 오랜만에 피자를 먹는거라며 내가 먹은 한 조각을 제외하고 나머지 피자를 다 먹었다. 그 모습이 왜 이렇게 짠하던지.. 일주일 전과는 또 다른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편해졌다고 벽이 허물어진 그는 내게 아기 같이 굴며 내 품속에 파고 들었다. 



그렇게 또 서로 끌어안고 잠이 들었고, 시몬은 오후 3시가 되도록 나의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도 탐하던 어린왕자였는데.. 인간의 심리는 왜 이리도 간사한지 (그냥 필자의 심리면서 인류로 포장해봄). 갖고 나니 탐스럽지가 않구나. 그가 이젠 좀 집에 가줬으면 싶었다. 그럼에도 일종의 책임감 때문인가, 어째서인지 그를 그냥 침대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뭔가 피자를 사주고 그가 내게 커들링을 해주는 갑을관계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되도록이면 나가서 낮의 햇살과 공기를 느끼며 커피든 브런치든 같이 먹고 친구처럼 시간을 지내다가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도 그는 돈이 없다보니 결국 필자가 늦은 브런치라도 먹고 가라고 사주겠다고 꼬드겨서 근처 프랑스식 브런치 식당에 갔다. 그는 먹으면서 또 내내 그의 가족 이야기를 했는데... 지난 번에 들었을 때와는 달리 짠한 이야기도 너무 반복적으로 듣다보니 지겨워지는 것을 느겼다. 벌써 내 마음이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내 아무리 나중에 돈이 많아서 슈가마미를 할 수 있대도 이렇게 구질구레한 상대와는 연애를 할 수가 없겠구나 하고 느꼈다. 









변화하는 그의 삶


얼마 후, 시몬에게서 또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다른 연락이었다.

그가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알려줬다.





그나마 좀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시몬에게도 책임감이란게 생긴걸까? 나에게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고. 필자는 진심으로 그를 축하해주었다. 그가 행복해지길 바랐지. 그리고 그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지난 번 짠함을 느낀 이후로 그를 원하는 내 마음이 많이 사그라들었으니 진심으로 그를 위해 기뻤다. 그는 눈치도 없이 그가 얼마나 행복한지 나에게 다 솔직히 표현했다.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 데이트비도 없는데 데이트를 너무 많이 하고 있다고. 자기 성격이 누구 좋아하면 골든리트리버 같아지는 거 알지 않냐고. 좋다고 신나서 자랑해대는 그가 조금 미워져서 필자는 심퉁맞게 '골든리트리버 맞니? 치와와 아니니?' 하고 놀리긴 했다만 그래도 잘 됐다 싶었다. 바텐더 일에서 오피스 일로 전환도 하고, 여자친구가 생겨 진심으로 깊은 관계를 이뤄나갈 수 있게까지 되었으니까. F***boy로 불리던 나의 어린왕자에게 꽃길이 열리는구나.  



머리는 분명 그랬는데 그래도 가슴은 조금 시큰거렸나보다. 또다시 간사한 인간의 심리.. 질리고 지겹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고, 그날 저녁은 어쩐지 좀 서러웠다. 슬픔의 원인을 헤아려보니 시몬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라기 보다는..  사실.. 왜 사랑할 준비가 갖춰지지 못한 그조차도 인연을 찾는데 나는 왜 이렇게 찾기 어려운걸까 도대체 언제쯤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날 혼자 일식집에 가서 사시미 한 그릇에 사케 한 병을 다 먹었다. 서럽고도 맛있는 사케 한 병이었다. 





필자의 예상을 벗어나 그럼에도 시몬은 그 이후로도 필자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했다. 커들링하자고 온 건 아니고 어디서 친구들이랑 술을 마실건데 재미가 없다며 조인할 생각이 있냐고 연락 온 적도 있고, 내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며 자기도 내가 노는 곳에 끼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확실히 해야 할 것 같아 그에게 '여자친구는?' 하고 물어보니, 만나고는 있지만 그냥 캐주얼한 관계라고. 음? 그게 무슨 소리야? 너무 좋아한다고 그럴 땐 언제고..? 시몬이 반품된 사람 같이 느껴졌다. 필자는 그런 시몬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그와 나의 관계 초창기에는 그가 내 연락을 씹었는데 이제는 내가 그의 연락을 씹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필자의 사무소가 호치민에서 하노이로 변경이 되었다. 필자는 호치민에서 의미 있는 사이를 만들어가던 모든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있는 사람 대여섯 명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는데 그중 하나가 시몬이었다. 사실 그냥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떠나고 싶었는데 시몬이 오히려 그러는게 어디 있냐며 작별파티를 하자고 먼저 말해줬다. 그렇게 말해준 그가 고마워 작별파티를 개최한 것이었는데 파티 당일날 그는 파티에 오지 못하겠다고 연락했다. 오피스 일이 잘려 돈이 급하고, 이전에 일하던 바나나 마마에서 평소보다 더 돈을 주기로 해서 일하러 가야 한다고. 실망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그와 마음의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고서는 호치민을 떠나기 며칠 전, 다른 친구와 바나나 마마에 갈 일이 있어서 갔을 때, 시몬이 아직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일일알바로 뛰는건줄 알았는데 아예 바텐더로 다시 돌아갔구나.. 어쩐지 어딘가 더 꼬질꼬질해져버린 그의 모습, 이발한 머리가 촌스러웠을까, 바나나 마마 유니폼이 우스꽝스러워서였을까. 머쓱하게 웃으며 브이를 하는 그가 구질구질해보였다. 시몬과 나의 긴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난다. 




마지막으로 바나나 마마에 간 날, 세 명의 바텐더 친구들과 한국인 남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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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과의 에피소드를 마치면서 맺음말



이 글을 쓰면서 시몬과의 지난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았고, 필자가 지독하게도 ENFJ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도 깨닫고 있다. 타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필자는 본인이 누군가를 구원해줄 수 있을거라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다. 그게 오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다. 네가 뭔데? 네가 누구를 어떻게 구하고, 네가 뭘 안다고 다른 사람의 삶에서 "옳은"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을 구분하여 인도하는데? 변명하자면 필자도 가끔 메타인지가 발동되는 순간들이 있고, 그럴 때면 필자가 삶에 대처하는 방식이 정말 오지라퍼에 오바싸바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중학교 때 책상 위에 붙여 놓을 좌우명을 고르라고 했을 때, 어떤 이들은 책에서 누군가가 말한 명언을 인용구로 넣었지만 필자는 그냥 내 생각과 내 언어로 좌우명을 쓰고 싶었다. 그것이 더 어리숙하고 멋드러지지 못하더라도 그게 가장 나에게 와닿는거니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좌우명을 쓰는 게 아니라, 내가 나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좌우명을 쓰는거니까. 그때 책상 위에 붙여 놓은 필자의 좌우명은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자"였다. 괴로움 속에 버둥대는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송두리째 탈바꿈하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쩌다가 비스무리하게 된 경우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예전에 초등학생과 중학생 대상으로 캠프, 과외, 학원 선생님으로 잠깐씩 경험해본 적이 있는데 그때 느낀 바로는 어린이에게 '선생님'은 - 즉,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란 - 상상초월의 수준으로 그 마인드와 심금을 울리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그들의 가슴에 새겨져 길이길이 삶의 나침반 역할을 하기도, 트라우마로 남아 곪아 가기도 한다. 신체적으로 성장해 나보다 키도 몸집도 큰 예비 고등학생들도 그 마음과 내면은 너무나도 여리고 작은 아이 같은 모습을 보았다. 그런 신체와 마음 크기의 차이를 느끼면서, 우리는 성인이 되어도 영원히 마음 속에 작은 아이가 있겠구나 싶었다. 그것은 필자가 타인을 보며 '나보다' 작은 아이라고 무시하는 오만이 아니고, 필자도 마음 속에 작은 아이가 있음을 고백하고 그저 그들과 공감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마음가짐은 일터에서 꼰대짓을 하는 상사를 보면서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인내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주었다. 그럴 때면 종종 필자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주는 가장 친한 친구는 "아니 언니!!! 나이가 몇 인데 아직도 애새끼 같이 구는 걸 왜 우리가 부둥부둥 해줘야 되는데요!!! 애새끼 같이 굴면 혼나야죠!!! 왜 우리가 계속 이해해주려고 해야 하는데요!!! 우리는 누가 부둥부둥 해주는데요!!!"라고 미간에 인상을 잔뜩 찌뿌린 채로 억울하다며 호소하겠지. 그런 그녀의 모습은 필자에게 따스한 위로가 되고, 웃음을 가져다 준다. 맞아! 어우 통쾌해! 그래도 말이지, 강자와 약자의 개념이 절대적이지 않고, 상황과 순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했을 때,  그 상황, 그 순간에서 상사가 약자의 모습을 보인다면 그 상황에서 강자일 수 있는 내가 이해해줘야 하는거지 뭐. 나는 강자인 나의 친구 앞에서 약자의 모습을 보이며 부둥부둥 위로 받고 있는걸. 아무튼 시몬 얘기로 돌아가자면..



시몬은 그런 면에서 필자가 참 애정하고, 그 내면을 파헤쳐 매듭진 구석을 풀어보고 싶었던 인물이었다. 비록 그는 다시 그가 원하지 않던 바텐더의 삶으로, 또 여자친구와도 헤어진건지 뭔지 애매한 관계로 돌아갔지만 그게 '실패'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와 필자가 함께 보낸 시간동안 필자가 그의 삶에 끼친 영향력이 막대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의 삶의 순간에 어떠한 감정과 생각을 일으킨 정도의 영향력은 끼쳤다고 생각하고, 그 정도의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에 충분히 감사하고 만족스럽다. 나의 좌우명에 걸맞는 애티튜드 같달까.




ㅡ 이상 ENFJ병에 대한 변명 끝. 








다음 편에는 도파민에 중독된 현대인의 모습을 분석해보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 하트.. 그게 뭐라고 엄청 힘이 되더라고요? 가끔 본인의 사연을 공유해주는 진심 어린 댓글도 달리는데요. 그런 댓글이 글을 꾸준히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되더라고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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