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그네가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발자국을 싫어하여 떨쳐내려고 도망쳤다. 발을 들어 올리는 횟수가 더해질수록 발자국은 점점 많아지고, 달리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그림자가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 자신은 달리는 것이 아직 더디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나그네는 쉬지 않고 질주하였지만 마침내 힘이 다하여 죽고 말았다. 그늘에서 쉬면 그림자가 없어지고, 고요히 멈추면 발자국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장자』 잡편, ‘어부漁父’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후 문맥을 살피면 “멋대로 예악을 꾸미고 인륜의 도를 가르쳐서 만민을 교화하려 하니 너무 일이 많지 않은가”하며 인위人爲에 치중한 공자를 꾸짖는 내용이다. 전후 문맥 없이 이야기만 따로 떼어놓고 보았을 때, 의미는 훨씬 풍부해 진다. 상징성이 강한 텍스트일수록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멋대로 해석되곤 하지만, 바로 그 단점 때문에 하나의 이야기는 열 사람의 독자에 의해 열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장점을 지니기도 한다.
‘자신의 그림자에서 도망치려다 죽은 나그네 이야기’가 한동안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림자를 떼어놓고 싶었다. 열심히 달렸지만 오히려 달리면 달릴수록 숨이 가빠지고 결국은 죽고 말았다. 그늘에서 쉬기만 했어도 죽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림자’와 '그늘'은 깜빡거리는 모르스-부호가 되어 나의 무의식에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았다.
분석심리학자 융은 자아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심리의 어두운 측면을 ‘그림자’라 했다. 자아는 진짜 본연의 자기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자신, 그리고 자기가 누구라고 인식하고 있는 자신인 반면, ‘그림자’는 자신의 일부분이지만 우리가 보려하지 않거나 이해하는 데 실패한 부분을 말한다. 자아의식이 밝은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림자는 그 반대편의 극단으로 치닫게 되며 이 둘 사이의 모순으로 인한 갈등과 회의는 오히려 자신을 고갈시킨다고 역설한다. 자신의 그림자에 저항할수록 외부에 투사하여 왜곡된 인식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렇다면 분열된 자기를 통합하고 그림자와 화해하는 방법이 무엇인지가 한동안 화두였다.
우선 '그늘'이 힌트였다. 그늘에 들어가 ‘쉼’을 통한 자기 응시와 성찰이 필요하다. 만약 외부의 것에 과민하게 반응했다면 외부를 탓하기 보다는 나 자신을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그늘 안에서는 그림자가 그늘이고 그늘이 그림자인 것처럼 언어로 분리된 나를 통합하고, 내가 그림자의 일부이고 그림자가 나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기수용’의 과정이 필요하다. 즉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이 텍스트로 나에게 수신된 모르스-부호의 암호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A에게 그림자는 ‘욕망’, B에게 그림자는 ‘상처’, C에게 그림자는 ‘자아상’, 그리고 D에게 그림자는 ‘생각’이라고 얘기했다. 욕망은 현재 없는 것을 미래에 기대하는 것이다. 상처는 과거의 기억이다. 자아상은 내가 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이미지, 즉 생각이다. 생각은 기대와 기억을 포괄하며 두려움과 불안, 후회와 상처를 파생하기도 한다. 우리는 때로 욕망, 기억, 생각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도망치려 할수록 빠르게 쫓아오는 그림자처럼, 달리면 달릴수록 많아지는 발자국처럼 마음을 어지럽힌다. 나그네를 살리는 방법은 ‘쉼’이다. 고요한 그늘에서의 응시는 욕망, 기억, 생각이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는 바람처럼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의 텍스트, 여러 의미를 정리하면서 도달한 사실이 있다. 우리는 가끔 그림자의 크기에 놀라서 '그림자는 무게가 없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이것을 먼저 깨달았다면, 어쩌면 나그네는 그림자를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