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마주한 어느 놀이터에서
늦은 오후 따사로운 햇살이 넘어가고 있는 그때였다.
나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우연히 바라보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그네 옆 벤치에 앉았다.
저녁 먹을 시간쯤에서 놀이터 주변을 둘러봤더니 아이들이 한 명 두 명 다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인 여자 아이 두 명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더 놀고 싶어 했다.
아이들의 동선을 따라 나의 어릴 적 추억이 자연스럽게 소환되는 듯했다.
기쁨과 슬픔이 공존한 놀이터는 누군가에겐 그리움의 대상이 떠올려지고, 누군가에겐 피난처가 되고, 누군가에겐 한없는 외로움을 달래준 곳이기도 했다.
미끄럼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던 햇살이 자취를 감추었는데도 아이들은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놀았다.
어쩌면 마지막 코스인 듯한 그네 앞으로 다가올 땐 활짝 웃었다.
아이들은 사이좋게 한 명씩 그네에 앉더니 주변에 사람이 있다는 걸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다.
둘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또래인 듯했다.
나는 우연히 아이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케이라는 아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제이야 넌 왜 집에 안 들어가?"
"으응, 집에 가면 오빠랑 같이 있기 싫어서."
"왜 오빠가 무섭니?"
"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가끔 심부름시키고 심부름 안 하면 날 때리기도 하거든."
"그럼 집에는 언제 들어갈 거야?"
"최대한 늦게."
"그럼 어두워질 텐데."
"난 그래도 괜찮아, 엄마가 퇴근하고 올 때까지 놀이터가 더 좋아. 가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도 만날 수 있잖아."
"맞아, 나도 놀이터가 더 좋을 때가 있어."
"어머 그럼 케이 너희 집도 엄마가 늦게 오시니?"
"응 좀 그렇긴 하지."
갑자기 아이들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안쓰러웠지만 내가 도울 방법도 다가갈 수도 없었다.
제이가 말을 이었다.
"케이야 넌 엄마랑 대화 많이 하니?"
"아니 별로 할 시간이 없어. 근데 우리 엄마는 엄마처럼 살지 않으려면 공부를 많이 하라고 하는데 정말 듣기 싫어."
"어머나, 우리 엄마도 가끔 그 얘기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도 기분이 별로였거든. 왜냐면 집에 가면 공부할 맛이 안 나는데 어떻게 공부를 하니. 엄마올 때까지 오빠 눈치 보느라 숙제도 제대로 못할 때가 많은데."
"맞아. 솔직히 어른들이 하는 말 이해를 잘 못하겠어. 짜증 나."
"그니까 말이야. 공부할 분위기와 환경을 만들어 주고 공부를 시키든가 말든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난 공부 같은 거 포기하고 싶어. 꿈이 없거든."
"어머, 케이 너도 그랬구나. 난 꿈 얘기하는 게 제일 싫어."
약간의 침묵이 어색한 듯 케이가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 모양이었다.
제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제이야 우리 재미없는 얘기 그만하고 누가 더 높이 올라가나 시합할래?"
"좋아, 슝슝 올라간다."
"이대로 질 순 없지. 기다려 내가 따라잡고 말테야."
"나는 이렇게 노력한 만큼 올라가는 게 좋아. 그네탈 때처럼 뭐든지 이루어졌으면 좋겠어."
"나도 꿈같은 건 없었지만, 우리 같이 생각해 볼까?"
"케이야, 그건 쉽지 않아. 이제 집에 가고 내일 또 만날까?"
"그래 좋아."
"잘 가."
아이들이 집으로 들어간 후 나는 빈 그네에 앉았다.
그러곤 아이들의 꿈이 살아나기를 빌었다.
그네를 타고 올라간 만큼만이라도 환경이 변화되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집안에서 울려 퍼지길 바랐다.
여행 중 어느 놀이터에서 마주한 아이들 내면의 소리가 뭔지 모를 숙제로 남은 거 같아 좀 먹먹했다.